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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이 사는 고쿄(황거) 옆, 히비야 공원(日比谷公園)에서 울려 퍼진 대한독립 만세!-도쿄 여행 속 역사의 발자취 Ⅲ-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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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7.22  10: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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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보예 쓰쿠바대학교 교육학 박사과정수료

지난 편에서는 1918년 1월 8일, 미국 윌슨 대통령에 의해 공포된 ‘민족자결주의(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와 2.8 독립선언의 경위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관련 기사 : 2019.7.15_천황이 사는 고쿄(황거) 옆, 히비야 공원(日比谷公園)에서 울려 퍼진 대한독립 만세!-도쿄 여행 속 역사의 발자취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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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에서는 2.8 독립선언 이후, 지속적으로 전개된 민족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2.8 독립선언 그 후,
왜 히비야 공원에서 만세를 불렀을까?

2.8 독립선언 그 후, 주요 멤버들이 잡혀간 도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거사 다음 날인 2월 9일 남은 유학생들은 히비야 공원에서의 2차 시위를 계획한다. 2월 12일, 100명의 유학생이 히비야 공원에서 대한 독립 만세시위를 준비하나, 만세를 부르지 못한 채 실패로 돌아간다. 그리고 유학생 이달 등 13명의 유학생이 추가로 구속된다.

2월 24일 오후 2시 30분, 유학생들은 또다시 독립운동을 계획한다. 그러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5인 중 4인(변희용, 최승만, 장인환, 강종섭)이 새벽에 연행된다. 다행히 서명자 중 도피했던 최재우가 숨어 있다가 등장하여 명주에 쓴 ‘조선청년독립단 민족대회소집 족진부 취지서’를 낭독하고 전단지를 배부하였다. 이날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기 위해 히비야 공원에 모인 유학생은 150명이다. 그리고 또다시 16명의 유학생이 추가로 구속된다.

왜 그들은 히비야 공원에서 만세를 불렀을까? 히비야 공원은 천황이 사는 고쿄(황거)와 주요 정부 관청에 둘러싸여 있다. 메이지 정부는 일본이 다른 서양 국가에 뒤처지지 않은 법 제도를 가진 나라임을 과시하기 위해, 1886년에 독일 건축가를 초청하여 관청집중계획에 착수한다. 고쿄를 중심으로 국회의사당, 재판소, 법무성을 우선 설계하고, 이듬해(1887년)에 다른 관청들을 설계한다. 그리고 1894년 일본 최초의 서양식(독일식)공원인 히비야 공원을 고쿄와 법무성 근처에 설계하였다.

▲ 법무성 구본관(빨간 벽돌동)=사진 심오선(snap the5Right45 대표)

*현재는 법무사료전시당(法務史料傳示堂)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일반인도 관람이 가능하다. 구본관 뒤에 보이는 두 개의 빌딩이 법무성 신본관으로 현재의 중앙 청사에 해당된다. 신본관이 세워진 자리는 2.8 독립운동 당시 제1 중학교가 있었다.
고쿄와 주요 관청에 인접해 있는 히비야 공원은 메이지 시대부터 각종 국가 이벤트가 거행되는 장소이자, 정치 운동의 근원지였다.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의 광화문에 해당되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도쿄 조선인 유학생들은 구속될 각오로 가장 영향력 있는 장소에서 독립운동을 거행한 것이다.

히비야 공원 소음악당에 울려 퍼진
대한 독립 만세

히비야 공원 어디에서 독립운동을 외쳤을까? 바로 소음악당이다. 히비야 공원에는 2개의 음악당있다. 소음악당과 대음악당이다. 소음악당은 1919년에 준공되었으며, 대음악당은 1923년에 준공되었다. 그 때문에 1919년 2월12일, 2월 24일에 계획된 독립운동은 소음악당에서 울려 펴졌다.

2.8 독립선언은 3.1운동뿐만 아니라 여러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2.8 독립선언에 참가한 유학생들은 제2회, 제3회의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아갔다. 2월 12일과 24일에는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3월 19일에는 염상섭(게이오대학)이 중심이 되어 오사카의 덴노지 공원에서 오사카 유학생, 노동자들과 함께 독립운동 계획하였다.

▲ 히비야공원 소음악당의 현재(2019년)=사진 심오선(snap the5Right45 대표)
▲ 히비야공원 소음악당 준공 당시(1919년)

※관련 기사 : 2019.2.25_3.19 독립 선언의 여흔 덴노지 공원(天王寺公園)-오사카 여행 속 역사의 발자취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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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亡國)의 젊은이로 살아야 했던 시절, 조선의 유학생들은 신지식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1904년부터는 사비 유학생이 급증하기 시작했는데, 식민지 시절 유학생의 약 90% 이상이 사비 유학생이었다고 한다. 농림, 수산, 의학, 공업, 상업 분야를 전공하던 관비유학생(조선총독부 파견)과 달리 사비 유학생들은 정치, 법률, 경제, 사회를 전공하면서 국가를 위해 움직였다. 유학 생활이 넉넉지 않았기에, 사비 유학생들은 신문 배달 인력거꾼, 일용 노동자, 점원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렇게 힘들게 손에 쥔 값비싼 지식을 그들은 조국을 위해 사용했으며 민족의 고동이 되길 자체하였다.

히비야 공원과 소음악당은 어디에 있나요?

히비야 공원은 도쿄역에서 도보 16분. 천황이 사는 고쿄와 법무성으로부터는 횡단보도 하나. 도쿄에서도 일본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곳에 있다.
나는 도쿄역에서 고쿄가이엔(황거외원)을 지나 히비야 공원으로 갔다. 고쿄가이엔은 고쿄의 상징 니주바시(이중교)를 촬영하는 사람들로 부적이고 있었다. 교육사를 연구하고 있는 나로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광경이었다. 연구 자료(조선총독부 발행 교과서)에서만 보던 삽화가 눈 앞에 펼쳐지니 묘한 감정이 날 휘감았다.

▲ 보통학교 국어독본(1912, 조선총독부 발행)
▲ 교코(황거)의 니주바시(이중교)=사진 심오선(snap the5Right45 대표)

고쿄가이엔에서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 히비야 공원에 들어섰다. 소음악당은 히비야 공원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솔라 시계(태양열 시계, 일명 꽃시계) 앞에 있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답사하러 간 날, 소음악당 앞은 국제 이벤트 준비로 분주했다.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민족자결주의’라는 세계정세를 파악하고 일찍이 2.8 독립선언을 준비한 유학생들. 그들의 목숨을 건 소신 있는 행동은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 정신을 본받아, 내가 가진 지식을 정의로운 곳에 쓰겠다고 다짐하였다. 당신의 지식 또한, 어디에서든 늘 정의로운 곳에 쓰이길 염원한다.

▲ 소라 시계와 축제 준비로 분주한 소음악당 앞 광장

<참고문헌>

[한국서적ㆍ논문]
김인덕(1999) 「일본지역 유학생의 2·8운동과 3·1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3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pp.1-27
김인덕(2011) 『망국의 추억 -재일조선인 민족운동-』 청암대학교 재일코리안 총서
윤소영(2018) 「일제의 ‘요시찰’ 감시망 속의 재일한인유학생의 2·8 독립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제97집, 한국민족운동사학회, pp.39-88
최태육(2019) 「3·1운동만세운동을 촉진 시킨 순국 청년 송계백(宋繼白)」 『일본의 심장부에서 “독립을 외친 청년들을 만나다”-3·1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 인물열전』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서울YMCA)

[일본서적]
樫原辰郎(2017, 가시하라 다쓰로) 『帝都公園物語』 (대일본제국의 공원이야기),幻戯書房(겐키쇼보)
新藤浩伸(2014, 신도 히로노부) 『公会堂と民衆の近代: 歴史が演出された舞台空間』(공회당과 민중의 근대: 역사가 연출된 무대 공간), 東京大学出版会(도쿄대학출판회)
進士五十八(2011, 신지 이소야) 『日比谷公園: 一〇〇年の矜持に学ぶ』(히비야 공원:100년의 긍지를 배우다), 鹿島出版会(가지마출판회)

사진제공=심오선(snap the5/Right45 대표),
김보예(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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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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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희
일본 최초의 서양식 정원으로 메이지 시대에는 군인들의 연병장이었고 전쟁 후 개장되어 정갈하고 아름다운 정원이지만 우리에겐 아픈 역사의 현장입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목숨걸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젊은 유학생,독립투사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각자 가진 지식을 정의로운 곳에 쓰이길 염원하는 작가님의 고운심성에 한 표~^^
(2019-08-13 07:4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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