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광재(광양경찰서 전 수사과장)

무릇 살아간다는 것은 승부의 연속이다. 더구나 제삼자인 구경꾼들은 확실히 이기고 지는 것을 원한다. 그래서 특히 운동경기에서는 무승부를 막고 승패를 결정짓기 위한 규정들이 제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 예로 미국의 MLB 야구와 우리나라, 미국의 농구에서는 무제한 연장전, 아이스하키와 태권도에서는 서든데스 연장전, 축구에서는 연장전 후 승부차기, 하키는 승부치기, 핸드볼은 승부던지기, 탁구, 배구, 배드민턴은 듀스제도, 테니스는 게임듀스를 거쳐 타이브레이크제도, 동전 던지기 등 다양한 무승부의 방지책들이 제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승자와 패자의 당사자들에게는 피차에 힘들게 하는 일이다. 패자는 나중에 반드시 이겨 설욕을 하여야 직성이 풀릴 것이며 승자는 우위를 지켜내기 위하여 노심초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약하거나 투철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서로가 비기는 무승부가 차라리 무난하여 마음 편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런 무승부의 논리는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간에도 통하는 경우가 있음을 이따금 느낀다.
아내와 남편 두 사람이 차원 높은 사람들이라면 피차간에 이기는 게임을 통해 서로의 장점을 발견하고 칭찬하며 자긍심을 느껴야 할 것이나, 현실 속의 평범한 부부는 승부를 가리지 않는 무승부에서 서로의 부족함과 인간미를 느끼고 연민의 정을 두텁게 쌓아가는 것 같기도 하니 말이다.
지난해 봄에 일어난 일이다.
시내에 볼일이 있어 혼자 내려가 있는데 아내가 전화로 귀갓길에 나더러 알타리무 두 단을 사 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어설픈 표정으로 시장 입구에 있는 야채 가게에 들어가 무를 찾고 있는데 여자 주인이 다가와 무얼 찾느냐고 물어 알타리무 두 단을 사러 왔다고 하였다.
주인은 반색을 하더니 가게 안쪽에서 파란 비닐포대에 담겨있는 알타리무 두 단을 가지고 나왔다. 상태를 살펴보니 잎이 시들어 싱싱해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주인은 어차피 겉잎은 뜯어내고 속잎만으로 김치를 담그니 괜찮다고 하면서 한 단에 4000원, 두 단에 8000원을 달라고 하였다.
폐기처리 직전의 알타리무를 어리숙한 남자에게 처리한 주인의 후련한 표정을 뒤로 한 채, 며칠 전 아내가 옥곡장에서 한 단에 5000원씩을 주고 산 사실을 알고 있었던 터라, 애써 아내보다는 싸게 샀다는 생각과 칭찬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내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뿌듯함을 안고 집에 돌아와 사 온 알타리무 포대를 주방에 두고 서재로 올라왔다.
책을 들여다보다가 아래층 주방으로 내려가 보았다.
아내는 깨를 볶고 있었고 부엌 바닥에는 내가 사온 알타리무는 풀어 헤쳐져 내동댕이쳐져 있어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깨 볶는 일을 도와주겠노라고 하였으나 내버려 두라고 거절하는 아내는 화가 많이 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동그란 아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데다가 성난 복어처럼 통통 부어 있어 왜 그러느냐며 그 이유를 물었다.
아내는 저런 걸 알타리무라고 사왔느냐 며 이집 저 집 다니면서 물건을 골라 사와야지 주말에 내 생일을 맞아 며느리 사위 딸 아들이 오면 김치를 맛있게 담궈 먹여야 할 텐데 성의가 없다며 김칫거리를 다듬고 싶지도 않다고 하였다.
싱싱하지 못한 무 상태 때문에 마음 한구석에 가졌던 편린의 불안감은 예상대로 적중하여 평소에 아내의 나에 대한 불만인 적당히 일을 처리하는 행태를 또 확인시켜 주고야 만 것이다.
그래도 나는 어이가 없었다. ‘심부름해 준 것도 어딘데, 그것도 아내보다는 저렴한 가격에’
그때 마침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놀러 와 속상해하는 아내를 달래며 김칫거리를 다듬어 주어 김치를 담금으로써 사태는 마무리되는 듯하였다.
그리고 도움을 준 이웃집 사람들과 내가 사 온 알타리무로 담근 새 김치에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그들로부터 김치가 아삭아삭하게 맛있다는 평을 들었다.
식사 후 아내가 후식으로 전날 사 온 참외를 깎아 내놓았다. 그런데 참외의 겉모습은 컸으나 껍질이 어두운 색깔을 띤 채 바람든 무처럼 서걱서걱 한 맛으로 보아 작년에 수확한 것을 저장해 놓았다가 가지고 나와 팔고 있는 것을 참외 장수의 감언이설에 낚여 크기만 보고 사 온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드디어 알타리무를 잘못 사 온 나의 실점을 만회할 기회를 잡게 되어 승부를 무승부로 만들 승부수를 던지게 되었다. 아내에게 그걸 금년 참외라고 사왔느냐, 색깔만 보더라도 금년 참외인지 작년 참외인지 모르겠더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랬더니 아내는 그 점은 자신의 잘못이라며 동점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함께 식사를 하였던 사람들이 내가 사 온 시든 알타리무와 아내가 사 온 작년 참외가 서로 비겨 1대1이 되어 무승부라며 심판을 내려 웃지 않을 수 없었으며 역시 우리 바보 부부에게는 패자가 없으니 설욕할 일도, 또한 승자도 없으니 방어하기 위해 분발해야 할 일도 없이 서로의 결점을 발견하여 메꾸어 가는 무승부가 제격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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