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석택 교육평론가, 자유기고가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각각 차기 정부의 명칭을 ‘민생’과 ‘시민’으로 내 세웠다. 민생은 여당 쪽 후보가, 시민은 야권 쪽 후보가 선보였다. 민생이야 누구나가 말하고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터이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의 정부’라면 다소 낯 설은 감이 없지 않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시민의 정부라는 네이밍이 시대정신을 잘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에 대한 공감을 곁들인 해설을 하고자 한다.

지난 날 군사정권을 무너뜨린 민주 정권들이 표방한 문민, 국민, 참여 등에 이어 시민이란 말은 만시지탄이 있으나 반드시 짚고 지나가야 할 중요한 화두인 것이다.
우리는 한 국가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인 주민을 부르는 말인 ‘국민’이란 말에 익숙해서 국민이라 할 것을 시민이라고 부르면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시민이 오히려 편안하다. 솔직히 나 자신은 법적으로 한국 국민이 아니다. 미국 시민이다. 미국의 시민권자이다. 이것은 우리 식으로는 미국 국민이다. 그러나 굳이 미국 국민이라고 하지 않고 미국 시민으로 통한다. 시민권을 부여받으면서 미국에 충성을 할 맹서도 했다. 그러므로 내 머리 속에는 국민과 시민의 구분이 없다.

그러면서 헷갈리기도 한다. 왜? 국민과 시민이 한국에서는 엄연히 구분되어 있는 것 같아서다. 서울시민이라는 말은 정당하나, 한국시민이라고 말한다면 이상한 눈으로 볼 것이다.

반대로 미국시민이라고 말하면 예사로 들리나, 내가 미국국민이라고 말하면 내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볼 것이다. 시민이란 말은 한 도시, 그것이 크건 작건 간에 도시 거주민을 말할 때 정상적인 표현으로 간주되는 것이 오늘 한국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히 야권 대통령 후보가 자기가 당선되면 그 정부의 문패를 ‘시민의 정부’로 달겠단다. 대담하다. 그가 성공하기를 바란다. 왜 나는 이런 말을 하는가?

우선 국민과 시민의 차이가 있는가이다? 필자는 ‘있다’고 생각한다.
근대 서구 사회에서 주류를 이룬 근대 국민 국가(modern nation state)는 그 영토 안에 사는 주민집단을 기초로 해서 정치적으로 주권을 확립한 집단이다. 그리고 이 국가라는 말이 널리 쓰이기는 했어도 그 정의가 명확하지는 않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 같이 일찍이 큰 저항 없이 성립된 경우나, 독일, 이태리 등 19세기 들어와서 강한 의식적인 배경에 의해 태어난 것들이 각기 국가라는 개념에 미묘한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20세기에 와서는 여러 후발 국가들이 그들을 모델로 삼는 데서부터 국가라는 개념이 강하게 부각되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에서는 그것조차도 한갓 ‘상상의 공동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논의가 있는가 하면, 근년에는 향후 30~50년이면 모든 국가 없어지고 하나의 유일한 지구공동체, 가이아 킹덤(GAIA Kingdom)이 발생할 것이라는 미래학설도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한쪽에서는 국가를 근대세계의 정치적인 통합의 규범으로 삼는 국민국가로 간주함으로써 그것을 건설하거나 확립 내지 신장시키려는 운동이나 이념이 발생했다. 이것이 내쇼널리즘(nationalism), 국가주의 또는 국수주의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19, 20세기에 와서 새로운 국가 통합이나 독립, 또는 국가 간 항쟁의 씨앗이 되었다.

특히 20세기 말 글로벌(global) 사상이 대두하자 그에 대한 대항으로 국가주의 또는 국수주의가 더욱 강조되는 경향을 낳고 있다. 바로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고 있는 영토 분쟁이나 중동지역의 장기간에 걸친 분쟁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것은 대국들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에고이즘(egoism)으로, 소국들로서는 자기 존재 주장의 근거로 원용되고 있는 양상이다.

이와 같은 추세에 맞선 것이 시민사회(civil society) 운동이다. 시민사회는 원래 봉건적이며 공동체적인 특권 신분 계급의 지배하에 살아온 도시민, 곧 브르조아지(bourgeois)가 주축이 되어 귀족계급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권을 탈취한 혁명을 거쳐서 이룩한 사회이다.

유럽에서는 네델란드의 독립혁명, 영국의 퓨리턴혁명과 명예혁명, 그리고 아메리카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 등이 그것들이다. 이들 국가사회는 모두가 ‘깨어있는’ 시민들의 힘으로 세워진 사회이며, 그 사회의 주인공이 바로 시민이었다.

한국도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면서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서 독재자들의 손아귀에서 정치적인 자유, 나라의 주인으로서의 권리 행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일어난 것이 1960년의 4월 민주혁명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군벌이 군화로 뭉개고 장기간 군사독재정치로 나라의 주인들을 국가주의의 노예로 삼았다.
그러나 끈질긴 반독재 투쟁으로 주권을 도로 찾은 민주 시민들에 의한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YS정부에 이어 김대중정부, 노무현 정부다. 그리고 이명박의 사이비 민주정부로 이어오다가 이번의 대선을 맞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몸집이 자라서 경제적으로 세계 10위권 내외에 들어섰으면 이제 머리도 그에 맞먹어야 한다. 환골 탈퇴할 때이다. 때맞춰서 야권 후보가 ‘시민’의 기치를 들었다.
이제 한국도 선진 시민국가들의 반열에 당당히 들어설 채비를 갖춰야 하지 않겠는가? 그 프레임 안에서 올바른 경제민주화, 참 민생문제도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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