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인철 기자

침묵은 금이 아니다. 아니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비겁함의 범주에 속할 일이다. 특히 자신이 스스로 행한 잘못을 두고 이를 외면하거나 침묵하는 행위는 그 잘못 위에 그보다 더 큰 잘못의 무게를 쌓아 올리는 행위다.

잘못을 깨달았다면 용서를 구하고 그 기반 위에 서야만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는 사실 앞에 굳이 망설임은 필요 없다. 사울이 ‘다마스커스에서의 참회’로 거듭나 비로소 바울이라는 새사람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광양시에는 이해할 수 없는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아 음침한 골목길을 횡횡하는 분위기다. 부디 몸과 마음을 흔드는 비바람이 조용히, 그러나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 또한 잊혀지리라는, 음흉스럽지만 우둔하기 짝이 없는 기원에 기댄 채 그 스스로 어리석다고 판단했을지 모를 자들의 망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민들로부터 위탁받은 권력을 자신의 영달을 위해 맞바꾸고자 했던 정치인도, 그 정치인에게 시민권력을 믿고 위탁할 수 있도록 간판이 되어줬던 정치집단도, 하물며 그로 인해 의문의 1패를 당한 동료들도 하나 같이 무거운 침묵을 선택했다.

그들이 침묵을 선택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들이 택한 무거운 침묵으로 그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위탁한 시민들이 무시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착한 주권자의 선택이 찢어발긴 휴지처럼 추락했다는 사실이다.

비례대표는 엄연한 대의민주주의의 한 축이다. 그런 까닭에 비례대표는 그가 속한 정치집단의 지지를 독점한 만큼의 무게를 어깨에 얹은 채 자신의 정치적 선택을 무겁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특히 시민사회가 위탁한 권력의 무게에 대해 더 두렵게, 엄중하게 여겨야 함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지만 한 정치인이 그러한 무게를 너무도 쉽게 내팽개쳤다.

정치인이 자신의 지지자들을 비롯해 시민들의 뜻에 반하는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할 경우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충분한 명분이다. 사소한 결정에도 그에 걸맞은 정치적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결단에는 예견된 반발을 무릅쓰고라도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존재해야 하고 그 결단으로 인해 파생되는 확실한 약속과 비전도 함께 제시해야 한다는 전제가 뒤따른다.

그러나 이 정치인은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그가 속한 정치집단과 의회는 물론 시민사회가 위탁한 권력마저 무시하는, 그 어떠한 명분도 찾아볼 수 없는 정치적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현재 자신에게 떨어진 결과에 대해 시종 모르쇠로 일관하며 일언반구 사과도 하지 않음은 물론 아무런 책임 역시 지지 않은 채 침묵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 정치인이 속한 정치집단 역시 과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선택한 다수의 시민에게 해당 정치집단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속 정치인의 황당한 행위를 단순히 정당의 절차조차 무시한 개인의 일탈이라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면 그 행위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 태도 역시 시민을 무시하는 처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 정치집단도 사과와 합당한 조치를 외면한 채 침묵을 선택했다.

허나 달리 생각해보면 그들의 침묵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들의 침묵이 그들 스스로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면 말이다. 선거를 앞두고선 그렇게 앞 다퉈 찾았으나 축제가 끝난 뒤 ‘더 이상 시민은 필요 없는’ 그들만의 세계로 이주해 버렸다면 그 침묵은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지금 침묵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민이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권력의 근원이며 정치 행위의 주인이자 사회와 공동체의 가장 소중한 성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선거는 때가 되면 반드시 주인을 찾아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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