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추억은 고독을 잊게 한다

▲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나는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보다 아름다운 이삭줍기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무렵 나는 또래의 친구들과 보리수확이 끝나갈 무렵이면 학교가 파하기가 무섭게 책보자기를 던져놓고 대바구니를 들고 보리나 밀을 거둬들인 논밭으로 이삭줍기를 나섰다. 가뭄에 콩 나듯 남기어진 밀이나 보리모가지를 줍고, 풋것은 골라 구워먹으며 검정이 묻은 입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친구들과 떠들어대다 해질녘이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집에 참외 장사가 들리면 어머니는 나의 간절한 눈빛을 차마 지나치지 못하고 내가 주어온 이삭 양보다 많은 보리를 내주고 탐스런 참외를 사고, 하나를 나에게 쥐어주었다. 아... 그 맛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고등학생시절에는 명절 때나 구경할 수 있는 고기 맛을 경험하고 영양보충을 하자며 친구 네 명이 의기투합하여 닭서리를 더러 했다. 달리기는 자신이 있는 시기라 여차하면 내빼자고 사전모의를 한 후였다. 아버지께서 한국전쟁 때 전사하시어 어머니를 모시고 혼자 사는 친구 집이 우리의 아지트가 되었다. 네 명이서 두 마리를 잡아오면 닭다리 하나씩이 차지되는 꿈만 같은 현실에 기쁨이 충만 된 눈빛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우의를 다졌다. 훗날 운 좋게 괜찮은 직장에 취직한 친구들도 직장동료들과의 회식이나 거래처에서 대접받는 훌륭한 어떤 음식도 닭서리에서 맛본 닭다리의 맛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야기하며 서로 웃곤 했다. 꼬리가 너무 긴 탓이었을까. 우리의 자만심 때문이었을까. 완전범죄라고 굳게 믿은 우리들의 닭서리는 얼마 가지 않아 들통이 나고 말았다. 우리들은 거듭된 성공 때문인지 반드시 멀리 가서 서리를 하자는 처음의 계획을 어기고 그날따라 충동적으로 같은 마을 언덕배기 하나 너머에 사는 노부부의 집에서 범행을 한 것이다. 출타했다 늦게 돌아오던 우리의 아지트 안 골목에 살던 이장님이 울타리 틈으로 불빛에 어른거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본 것은 악재가 겹친 탓일 것이다. 이장님은 노인네의 하소연 편에 선 것이다. 할아버지는 두엄자리에서 이름까지 지어주며 애지중지 기르던 꾸꾸와 꼬꼬의 깃털을 너무나 쉽게 찾아내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거의 담담한 표정으로 공부 잘하고 모범생이라던 너희들이 이런 못된 짓도 하는구나 하시며 혀를 끌끌 차며 돌아가셨다. 나머지 조용한 뒷수습은 우리들의 어머니들 몫이 되었다. 우리들은 짧지 않은 기간을 얼굴을 들지 못하고 근신을 하며 지냈다.

죄 값 일까. 나는 풀을 베다 왼쪽 검지손가락을 낫으로 베어 쑥을 찢어 응급처방을 한날 저녁 나를 타이르는 퇴비의 소중함에 대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어김없이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보탬도 덜함도 없이 처음 이야기가 아닌데도 똑같은 속도로 처음처럼 말씀하셨다.

옛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노총각이 천우신조로 늦장가를 가게 되었다. 신부는 가난한 가정에서 어렵게 자랐지만 착하고 총명하다는 소문이 난 이웃마을 아가씨였다. 집안의 살림살이를 조용히 살펴본 새댁은 밥상을 들고 들어와 시아버지와 남편 앞에 놓으며 한 가지 생각을 이야기했다. “외람되오나 제 말대로 지켜주신다면 5년 내로 어려운 가세를 일으켜 세우겠습니다.” 가난을 운명처럼 여기고 살아온 두 부자는 특별한 묘책도 없었고, 며느리가 지혜롭다는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해서 새댁의 의견에 따르겠노라 언약을 했다. “그러면 농번기에는 매일 아침저녁을 골라 풀 한 짐씩을 해오시고 농한기에는 풀 두 짐씩을 두 분 각각 해 오십시오.” 의외로 간단한 주문이었다. 새댁은 손 매무새가 야물어 이웃마을까지 찾아다니며 삭 바느질 감을 구해와 열심히 일하였고, 상위의 밥그릇은 잡곡밥이라도 근자에 구경 못한 고봉이었다. 찬도 소찬이나 정갈하여 먹을만하다보니 두 부자는 무더운 여름날에도 정자나무아래서 쉬는 이웃들과 달리 고된 줄도 모르고 풀 더미를 쌓아갔다. 1년이 지나니 집은 퇴비 더미로 넘쳐났다. 남의 땅을 빌려 소작하는 것이 어려운 시기였지만 거름 더미를 눈여겨본 지주들에 의해 두 부자는 소작면적이 꾸준히 늘어났고 퇴비를 충분히 주니 소출도 늘어 부자에게 돌아오는 몫도 늘어갔다. 지주들도 땅 심이 좋아졌다며 기뻐하였다. 새댁이 일러준 대로 두 부자는 새로 개간한 싼 땅을 사서 거름을 충분히 주고 부지런히 다듬어서 좋은 땅으로 만드는 등의 방법으로 재산을 늘려 5년이 지나자 마을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부농이 되었고 손자들도 생겨나 행복하게 살았다 한다.

아버지가 들려주신 그렇게도 듣기 싫었던 이야기들은 대부분 잊었지만 요즈음 나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되고 있다. 더불어 어린 시절 내가 경험한 재미있는 추억들도 새록새록 피어나 어린 시절 누나들이 상처에 발라주던 옥도정기와 아까징끼처럼 고독이라는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소독을 해준다. “해질녘 강가에서 노을이 너무 고와 낙조인줄 몰랐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정다운 이야기 들을 추억하며 세월 감을 잊고 그냥 웃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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