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 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어쩌다 우리 네 가족은 아무 연고도 없는 남도의 산자락에 뿌리를 내렸다.

근원을 알 수 없는 한바탕의 바람에 이끌리듯 한 곳을 향해 흘러왔다. 알 수 없는 인생이라고 말하지만 각자 다른 도시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한마을에서 함께 사는 현실을 보자면 정말로 그런 느낌이 든다. 멀리 떠난 줄로 알았던 딸들이 한마을에 모여 살다보니 장모님 가슴에도 바람이 일었다. 딸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곳이 좋아라고 마치 당신의 고향인 양 자주 드나들던 장모님은 아예 당신의 거처를 이곳으로 옮겼다. 그렇다고 장모님은 당신이 아들 딸을 키우며 정붙이고 살았던 고향을 버리거나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한동안 멀리서 딸들을 그리워하다가 그들 곁에 살았으면, 그렇게 살다가 갔으면 했다. 매번 그렇게 마음속으로 외치며 때로는 간절하게 기도하다 결국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당신은 무엇이든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며 강한 신념으로 살고 있으며 지금도 교회에 나가지 않는 나를 보면 혀를 끌끌 차신다. 장모님은 그렇게 우리 마을에서 벌써 몇 년 째 머물러 계신다. 95세의 고령이지만 이따금 마음이 심심해지거나 햇살이 좋을 때면 당신은 좀처럼 집안에 머물러있질 못한다. 이 좋은 날 딸과 사위들은 뭘 하고 지내는지 더러는 살림살이가 괜찮은지 걱정스럽기도 하고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 때마다 노인네가 별 걱정 다한다면서 딸들은 수시로 핀잔을 주지만 그렇다고 솟아나는 당신의 호기심을 짓누를 수 없다.

마을 곳곳에 새로운 터전을 잡고 있는 딸들 집까지 한 바퀴 순례를 끝내야 직성이 풀린다.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길을 걷다가 숨이 가빠올 무렵이면 가까운 곳에 딸집이 나타난다. 그곳이 몇 째 딸이든 그들이 집에 있든 들판에 나가있든 괘념치 않는다. 집 앞에 다다르면 숨을 고르며 물끄러미 집을 둘러본다. 정원의 풀이 무성하거나 단정하거나 지저분하고 깨끗한 주변에 관한 이야기들이 시시콜콜 쏟아진다. 한동안 답답하게 억눌려 있던 당신의 마음이 그제야 활기를 띤다. 당신이 첫 번째 다가선 딸집에 중간역처럼 머무는 동안의 풍경은 당신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잠시 다가왔다 사라진다. 당신의 이야기는 때때로 무료하고 단조로운 일상에 가미되는 조미료처럼 맛깔난 하루를 만들어가기도 한다.

점심을 먹고 천천히 골목길을 돌아나가면 지척에 또 다른 눈에 익은 집이 눈에 들어온다.

또 다른 딸이 사는 집이다. 당신은 그렇게 길을 걷다가 숨이 차거나 피곤해지면 가까운 딸집에 눌러앉게 되고 언제 그 소식이 닿았는지 딸과 사위들이 모이고 한바탕의 요란한 웃음이 인다. 마을 안 어디서든 당신은 자유롭고 익숙하며 네 딸들이란 든든한 빽이 등 위에 있음이 자랑스럽다. 딸들은 수다와 잔소리를 주고받는 상대로서는 결코 만만치 않지만 당신이 남편과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고향과 그곳에 남아있는 아들을 잊게 한다.

나는 막내사위이지만 당신의 살아가는 광경을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나도 당신과 같은 노후를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랑하는 딸들과 한평생을 가까이 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겐 딸이 하나뿐이고 아들이 하나 있을 뿐이며 그런 것을 생각하기엔 아직 너무 어리다. 더군다나 남자인 내가 그런 호사를 꿈꾼다는 것은 분명 무리인 듯하다.

장모님은 요즘 들어 침대 맡에 마련된 작은 책상에 앉아 다소곳이 책을 읽는 장면이 부쩍 눈에 띄었다. 책 가까이 얼굴을 내밀고 글자 하나하나를 찾아나서는 돋보기 사이로 글자를 탐하는 눈동자가 살아있는 듯 반짝이곤 했다. 무슨 책인지 궁금하기도 하여 살금살금 어깨너머로 다가가 내려다보니 ‘한국사 100장면’, ‘숲속의 이상한 샘’, ‘가슴 뛰는 삶’, ‘5분 지식’ 놀랍게도 장모님은 다양한 독서를 즐기고 있었다.

당신에게 가슴 뛰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한국의 역사가 당신의 현재와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그 연세에 과거를 더듬어보며 새롭게 터득되는 지식들은 당신 앞에 남은 삶에 대한 기대일까?

“ 그냥, 재미있어.”
당신은 조금 부끄럽고 쑥스러운 듯 나지막이 웃었다.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침대에 누워 돌아보면 당신이 책을 읽으며 노년을 보낸 그 시간들이 행복한 시간에 힘을 보태준 것이 아닐까?

장모님을 통해 나이 든 노인들에게도 지식에 대한 욕구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욕구가 강하게 살아있음을 느끼곤 한다. 함께 늙어가는 딸들의 재롱 섞인 잔소리를 곁에서 들을 수 있는 것마저도 당신에겐 행복이다. 책을 읽는 장모님을 보면 당신이 책을 읽으면서 보내는 시간들에서 덧없이 지나온 시간들을 보상받을 수 있을 듯하다.

당신이 쌓아올리는 독서의 탑에는 당신이 모르고 살아왔던 세계가 젊음인 양 쌓여 있지 않을까? 특별히 일 할 것이 없을 때 책을 통해 만나는 새로운 세계에 빠진 채 세월 가는 줄 모르게 나도 살고 싶다.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지니는 건강함과 독서의 습관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행복한 노년인지........

책을 읽는 당신의 지혜로움이 내 가슴 속에 종종 파문을 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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