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陽에 살았던 史람들이 만든 이야기-1

“광양에 살았던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 연재를 시작하며

역사는 오래된 미래입니다. 흔히 역사는 과거의 고정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래가 현재의 노력 여하에 따라 바뀌듯, 역사도 현재의 노력으로 새로이 만들어집니다. 새로운 유적과 사료가 발견되고, 또 기존과 다른 해석이 이루어지면 역사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이것이 2006년 『함께 보는 광양역사교과서』를 썼던 필자가 광양의 역사를 다시 쓰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최근의 발굴과 연구 성과를 담아 “광양에 살았던 史람들이 만든 이야기”를 온 힘과 정성을 기울여 서술해보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질책을 기대합니다. <이은철>


광양의 첫 사람

“역사는 언제 어디서 시작하였을까?” 이 질문은 “인류는 언제 어디서 처음 출현하였을까?” 와 같은 질문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인류의 삶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학문이고, 지구 어떤 곳에 인류가 탄생한 바로 그 순간이 역사가 태동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 봉강면 석사리 구석기 유적지
지구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살기 시작한 곳은 검은 대륙 아프리카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약 700만 년 전의 사헬란트로푸스와 약 440만 년 전의 아르디피테쿠스 등이 인류의 먼 조상으로 최근 인정을 받고 있다.
이후 약 400만 년 전에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모두 비록 구부정하지만 서서 걸어 다닌 ‘원인(猿人)’, 즉 아직은 원숭이에 가까운 어설픈 인류였다.

▲ 봉강면 석사리 석기
약 250만 년 전에는 원숭이와 확실히 구분되는 자유로운 손으로 도구를 쓰는 사람이 등장하였다. 고고학자들은 이들에게 호모 하빌리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어서 곧게 설 수 있는 사람인 호모 에렉투스, 다음으로 생각하는 사람인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하였다. 드디어 약 4만 년 전에는 오늘날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이라 할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등장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아프리카에서 등장한 호모 속에 속하는 인류들의 화석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어 이들이 아프리카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호모 속의 인류가 사용한 주요 도구는 길가에 나뒹굴다 자연적으로 ‘깨진’ 돌멩이가 아닌 목적의식을 가지고 ‘깨뜨린’ 돌멩이, 즉 뗀석기였다. 이러한 뗀석기를 사용한 시대를 ‘구석기시대’라 이름 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구석기 문화의 상한은 약 250만 년이라 할 수 있다.

광양에 사람이 출현하다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은 1935년 함경북도 동관진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나, 당시 일제는 한반도의 구석기 시대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구석기 유적이 공식적으로 발견된 것은 1960년대이다. 1963년에는 북한에서 웅기 굴포리 유적이, 1964년에는 남한에서 공주 석장리 유적이 발견된 이래 한반도 지역 전체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오래된 단양 금굴 유적이 약 70만 년 전의 것으로 이때부터 한반도에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 옥룡면 용곡리 흥룡 구석기 유적지
한편 전남에서 구석기 유적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62년 순천 근처의 바닷가 언덕에서였다. 그러나 현재 그 유물의 행방도 알 수 없어 정확한 평가가 어려운 상황이다. 전남 지방의 본격적인 구석기 유적 조사는 1980년대 후반 주암댐 수몰 지역이었던 순천, 화순, 고성 등에서 구석기 유적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전남에서 100여 곳의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

▲ 옥룡면 용곡리 흥룡 석기
그럼 과연 우리 광양에도 구석기 시대에 사람들이 살았을까. 아직은 광양에서 구석기 유적이 정식으로 발굴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2000년에 순천대학교 박물관이 광양시의 『문화유적분포지도』 작성을 위해 조선대학교 박물관의 도움을 받아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봉강면 석사리 서석마을, 옥곡면 대죽리 대치마을, 옥룡면 용곡리 흥룡마을ㆍ옥동마을ㆍ주천리 죽림마을, 진상면 지원리 창촌마을 등 총 6개소에서 구석기 유적을 확인하였다. 유적의 입지는 해발고도 50~100m에 해당하는 언덕이며, 석영암 재질의 몸돌ㆍ주먹도끼ㆍ격지 등의 뗀석기가 수습되었다.

광양의 구석기 유적은 4만년~1만 년 전의 후기 구석기 시대에 해당한다. 이로써 우리 광양에서도 늦어도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는 사람이 살고 있었고, 바로 이 순간부터 광양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앞으로 전기 또는 중기의 구석기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남아 있다.

구석기 시대 광양만은 육지였다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던 구석기 시대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이 살다간 흔적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구석기 시대 사람이 살았던 곳에서는 여러 가지 뗀석기와 뼈 도구, 화덕 등이 발견되었다. 그들이 사용한 주먹도끼ㆍ찍개 등의 뗀석기를 통해 무리 지어 사냥하며 이동 생활을 하고, 긁개ㆍ밀개 등의 뗀석기를 통해 채집한 열매와 사냥한 동물을 조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화덕을 이용해 난방하고 음식을 익혀 먹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구석기 시대 광양의 자연환경은 지금과 전혀 달랐다. 구석기 시대는 빙하시대여서 빙하기와 간빙기가 수만 년 혹은 수십만 년의 주기로 반복되었다.

▲ 진상면 지천리 구석기 유적지
이중 빙하기에는 지금보다 평균 기온은 약 10도 정도, 해수면의 높이는 120~135미터 가량 낮았다. 이 시기 평균 깊이 44미터, 최대 깊이 103미터에 지나지 않는 현재 우리나라의 서해는 당연히 육지였으며, 중국대륙과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 진상면 지천리 석기
따라서 구석기 시대 빙하기의 광양은 바닷가가 아닌 내륙 깊숙한 곳이었으며, 현재의 광양만은 당연히 육지였다.

광양의 백운산 자락에서 무리지어 이동하며 당대의 맥가이버 칼인 만능 석기 ‘주먹도끼’를 들고 들짐승을 사냥하던 구석기인이 현재의 광양 토박이들과 연결될까? 지금까지 구석기 시대를 살던 인류는 빙하시대가 끝나자 어디론가 떠나고 현생 인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음이 교과서적 정설이었다.

그러나 최근 일부 학계에서는 구석기 시대 말의 주민 집단이 신석기 시대에도 계속 유지되고 있었음을 주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적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연천 전곡리 유적을 발견한 사람은 주한 미군 병사 그레그 보웬이었다.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였던 그는 1978년 연천 한탄강 강변을 여자 친구와 거닐다 우연히 주먹도끼를 발견하였다. 이렇게 발견된 전곡리 유적에서는 5천여 점의 구석기 시대 유물이 발굴되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당신의 발길에 차이는 돌멩이가 광양의 구석기인이 애써 만든 주먹도끼일 수 있다. 그것은 광양의 구석기인이 당신에게 내려준 행운이다. 물론 그런 행운은 광양의 역사를 사랑하고 주먹도끼를 알고 있는 자에게만 주어질 것이다.


▲인류와 동물의 차이
인류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직립 보행과 도구를 만들어 사용한다는 것이다. 뒷발로 서서 걷게 되면서 앞발은 땅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손이 되었다.
이 두 손을 이용하여 도구를 만들어 쓸 수 있었고, 두뇌용량이 커져 지능이 발달하게 되었다.

▲인류의 진화 과정
사헬란트로푸스ㆍ아르디피테쿠스 →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남방의 원숭이) → 호모 하빌리스(손쓴사람) → 호모 에렉투스(곧선사람) → 호모 사피엔스(슬기사람) →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슬기슬기사람), ‘호모’는 라틴어로 ‘사람’이라는 뜻이다.

▲역사는 오래된 미래
한반도의 구석기 시대는 태어난 지 불과 80년 남짓하다. 역사는 이렇게 새로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수천·수만 년 후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듯이, 수천·수만 년 전의 과거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즉 역사는 오래된 미래이다.

▲각종 뗀석기
주먹도끼는 세장한 형태의 돌 양 측면을 가공하여 날을 세우거나 뾰족한 끝 부분을 만든 대형석기이다.
몸돌은 석기 제작 과정에서 돌덩이 표면을 두들겨 격지를 떼어내고 남은 돌이며, 격지는 몸돌에서 망치로 떼어낸 돌 조각이다.

▲빙하기
빙하시대에는 4차례의 빙기가 있었는데, 오래된 것부터 귄츠빙기·민델빙기·리스빙기·뷔름빙기라고 한다. 빙기와 빙기 사이에는 기후가 온난하였는데 이 시기를 간빙기라고 한다.

▲연천 전곡리 유적
경기도 연천 전곡리에서의 주먹도끼 발견은 세계 고고학계의 정설을 바꾼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전까지 인도를 경계로 동아시아는 외날 석기인 찍개 문화권으로, 서쪽 지역인 유럽과 아프리카, 서아시아 일대는 양날의 주먹도끼 문화권으로 구분하였었다.
그러나 전곡리에서 주먹도끼가 발굴되면서 이러한 학설은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은철 선생 약력

1988년 경북대학교 유전공학과 졸업
1992년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졸업
1999년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역사교육과 석사
2003년 경상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6년『함께 보는 광양역사교과서』(광양만신문)
2010년『매천 황현을 만나다』(심미안)
2013년 현재 광양제철중학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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