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산책길에 낙엽이 떨어져 소복이 쌓였다. 아스 팔트 위에서는 청소 대상이지만 숲길에서는 한철 애써 키운 나무 아래 떨어져 기꺼이 거름이 되고 자 자리를 잡고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가쁘게 숨 을 쉬고 있다.

나이가 들며 내 몸과 마음 둘 곳을 생각하면서 도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 다/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 들이고/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 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더 깨 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저들이 고/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제 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그나마 오래오 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사람들의 까다로 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꾸기 위해/ 서리에 맞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어릴 적 담배를 즐기는 노부모님과 좁은 방을 같이 쓰다 보니 기관지가 나빠져서 그런지 책 읽 다 입이 궁하면 생 무를 즐겨먹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5일 시장에서 무 한단을 샀다. 잎은 잘라 버 리고 무만 달라니까 무 파는 아주머니가 잎은 된 장국 끓이면 맛있다며 한사코 같이 가져가라 권 한다. 그날 저녁 입맛이 없던 차에 집사람이 끓여 준 시래기 된장국에 모처럼 저녁을 고맙게 먹었 다. 세상사 쓸모를 생각해보고 시래기의 소중함 을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퇴직 후 농사에 종사하면서 뿌린 대로 거둔다 는 말속에서 ‘정직’을 배우고, 작물은 주인의 발자 국 소릴 듣고 자란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성실’을 익혔다. 나의 노력 위에 햇볕과 비와 바람과 계절 의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익어가며 고 개를 숙이는 작물을 보며 ‘겸손’을 생각하며, 퇴직 후 경쟁에서 해방되면서 선함과 사랑을 배웠다.

늦은 나이에 국어국문학을 공부하며 소위 인문 학적 사고의 깊이를 가진 것도 농사의 덕분이었 다. 모든 작물들은 어릴 적에는 실로 미미하지만 비바람 무더위에 견디고 자라 사람들에게 소중 한 먹을거리가 되기 위해 수확할 때는 곱고 탐스 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인간은 반대로 어릴 적에 는 고사리 같은 손, 영혼마저도 맑게 해주는 고운 눈동자와 맑은 미소의 천사에서 나이를 먹을수록 온몸에는 주름이 생기고 얼굴에는 소위 저승꽃이 핀다. 몸은 유연성이 줄며 불편함이 늘고, 저항력 이 떨어지며 병마가 기웃거린다. 이유 없이 서운 한 마음이 생기고 고독이 밀물처럼 몰려온다. 스 스로가 천덕꾸러기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늘어 난 삶이 무료하게만 느껴진다. 결국 인간의 주검 은 볏단 한단의 가치와 비교가 된다. 인생은 사후 천당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주인으로서 살아 있을 때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라 가르쳐 주는 것 같다.

마지막 가는 달이 아쉬워 평소 갖는 모임에서 대 선배님 두 분을 초청하고 망년회를 가졌다. 인 생을 살아가는 데는 나침판이나 등대 역할을 하 는 롤 모델(role model)을 정하고 존경심을 가지 고 본받으려 노력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기 때문 이다. 한 분은 소위 말하는 오복을 다 가지신 분 이란 말을 들으며 항시 여유 있게 웃으며 단정한 옷차림과 깨끗한 몸가짐으로 노신사의 표상을 보 여주고 계신다. 또 한분은 입지적인 삶을 살아온 후덕한 분이시다. 두 분 다 어려운 병마와 싸우면 서도 베풀며 살아가시며 한마디로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멋있고 존경스러운 분들이시다.

모두 노년이 되다 보니 대화의 주제가 건강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여생을 어떻 게 지혜롭게 마무리하고 후회 없이 죽음을 맞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나는 혼자 『인터스텔라』 영 화를 생각해보았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원리’ 를 통해 시간은 절대성이라는 통념을 깨고 상대 성임을 천명한다. 즉 중력이 클수록 시간은 천천 히 간다고 이야기한다. 영화는 인간의 탐욕으로 황폐화된 지구 대신 인간이 옮겨갈 행성을 찾아 쿠퍼 일행이 우주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 다. 쿠퍼는 중력이 매우 큰 블랙홀 인근 밀러 행 성을 여행하며 늙음이 늦어져 지구 귀환 시 딸 머 피보다 젊어 보이게 된다. 영화는 현재에 머물지 말고 시공간을 초월해 나아가라 이야기한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이병철은 러시아 아무 르강 밀림에서 2주 동안 기거하며 110cm가 넘는 괴어 타이 멘을 잡아보는 순간을 회상하며 “모험 의 세계에선 다른 중력이 적용되는 것 같았다.”라 고 확신한다.

삶에서 시간의 흐름을 천천히 하는 보다 큰 중 력은 과연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무료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두려움 속에서 살고, 어떤 사람 은 몰입 속에서 현재를 확대해가며 죽음을 잊고 살까. 기쁨과 슬픔, 깊은 애환까지도 기꺼이 받아 들이며 열심히 살아가는 삶의 무거움이 큰 중력 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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