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코로나19의 공포 대문일까? 죽음을 주제로 하는 책들이 쏟아진다. 수천 년 인류가 낳은 뛰어난 지성들인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단테, 데카르트, 니체, 사르트르 등의 성찰에도 만족하지 못한 워낙 심오한 영역이라 서로 주장하는 부분이 다양하다.


평균수명이 20세 전후에서 80세 이상으로 늘어난 상황이라 죽음을 생각해야 할 시간이 길어 지고 천당에 의지하며 위안 받기는 우리들의 머리가 너무 커지고 복잡해진 탓일까? 삶이 길어진 만큼 병마와 싸우는 고뇌의 기간이 길어진 탓일까?

오 남매의 막둥이이자 늦둥이로 태어난 나는 부모님과 두형과 두 누나의 사랑을 많이도 받고 자랐다. 손위 누나 외 다섯 분을 차례로 떠나 보내며 죽음이 주는 슬픔과 의미를 자주 생각해 보고 죽음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케이틀린 도티는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 이라는 책에서 비극이 아닌 희극으로 죽음을 보 자며 “죽음을 부정하거나 왜곡시키는 문화는 잘 죽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라고 말한다.

“죽음을 두려워한 인간은 대성당을 세우고 전쟁을 선포하며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하며 죽음을 오직 두 \려움의 대상으로 여기며 삶의 가장자리로 내몰았다”라고 주장한다. 죽음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 \한 인간들 또한 슬픔을 애도하고 망인을 천당으로 모시기 위해, 풍속에 따라서는 인간으로 다시 환생을 기원하기 위해 너무나 큰 희생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부모를 떠나보낸 자식은 죄인이라며 탈상을 할 때까지 3년 동안 묘소 근처에서 움집을 짓고 산소를 돌보는 시묘 생활을 하기도 했고, 얼굴도 보지 못한 조상들의 제사를 잊지 않고 모시기 위해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동남아 어떤 민족은 거의 일생 동안 땀 흘려 모은 재물을 부모님 상례와 제례에 모두를 쓰기도 한단다. 죽음은 슬픈 일이지만은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는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서양 사람들 이 영혼과 주검을 구분하는 것처럼 우리 조상들은 혼 불을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마을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려면 혼불이 나간다고 하고 혹자는 혼불을 본 사람이 있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이 소박한 이야기의 근저에는 사람이 죽을 때에는 혼이 이미 빠져나가 혼이 없는 육신은 죽음의 고 통을 못 느낀다는 희망사항의 표현은 아닐까.

작가 권혁란은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라 는 책에서 “끼고 있던 슬픔이라는 장갑을 벗고 그 손으로 수저를 들어 밥을 먹고 있다”라며 엄마의 죽음은 슬프지만 존엄하고 아름답게 애써 해석하 며 자기 앞의 삶을 생각한다며 이성적 이별을 여린 주먹을 쥐고 이야기한다.

일본의 다큐멘터리 감독 세키구치 유카는 거의 10년 어머니를 간병하다 89살로 세상을 떠나보 내며 임종을 지켜보는 고통과 연명치료 결정 등 어려움을 아들에게는 물려주지 않기 위해 스위스 병원에 안락사를 등록하였다고 한다. 『오싱』을 쓴 일본인 하시다 스가코는 “의식이 확실해도 몸을 움직일 수 없다면 살고 싶지 않다”, “즐거움 이 없어지면 역시 살고 싶지 않다”라며 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 싶다고 말한다. 개성은 죽음까지도 살갑게 다가오게 만드나보다.


17세기 라로슈푸코의 말처럼 “태양도 죽음도 눈이 부셔 정면에서 뚫어지게 바라볼 수 없다” 지만 사람들이 모르니까, 그리고 금기시하니까 더 무서워하는 것은 아닐까? 죽음에 대한 숙고가 깊어지고 담론이 심화되면 자신이 죽음을 준비하고 존엄하고 품위있게 생을 마무리하고 싶은 바람이 커진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우리는 죽음에 대한 몰이해로 의식적으로 죽음을 거부하거나 도피하려 한다” 라고 말한다.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상에 출현하고 진화하는 과정에 죽음은 필연적이고 본질적 인 역할을 해온 긍정적인 현상임을 잊어버린다” 라고도 한다.

중국의 열자는 “나에게 닥칠 죽음이 통상적이고 다른 사람들의 운명과 같은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슬퍼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전해진다.


나는 평범한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죽음을 이해하고 준비하는 몇 가지를 나름 생각해본다. 부 모님에게서 내가 오직 사랑 속에서 태어났다면 나 또한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세상사 뜻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목표를 정하고 노력을 한다면 삶의 습관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너무 일찍 죽어 가족을 슬프게 하거나 건강을 잃고 너무 오래 살아 가족에게 정신적 경제적 부담은 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최소한의 성취를 이뤄 자부심과 위안을 안고 떠나가야 하지 않을까.

새로움과 즐거움을 찾아 열심히 살아서 스스로 쉬고 싶고 잠자고 싶은 마음에 점차 익숙해져야 한다. 임플란트를 하면서도 마취 없이 위투시를 하면서도 불편함과 생경함에 당당히 맞서며 죽음이 주는 사랑과 공감, 평등과 완벽한 쉼을 경험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삶은 슬픔과 시련이 따르지만 우리가 지식을 얻고 사고의 지평을 넓히며 새로운 것에 도전하 고 꿈을 실현해가는 멋진 기회다” 잘 죽으려면 잘 살면 된단다. 책임과 의무를 늘 생각하고 타인의 고통에 예민한 사람은 죽음은 무거운 짐을 내려 놓는 것과 같다 한다. 태어남이 사랑을 받은 축복 이라면 죽음은 사랑을 돌려주고 가는 또 다른 축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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