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어르신들과 그림으로 삶의 여유와 활력 찾기
포스코 은퇴 후 귀촌한 조규홍 당저마을 이장님의 도전
마을 역사와 잊혀진 지명, 스토리 등 발굴…전시회도

 옛날 마을 공동 우물터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했던 풍경들, 두레, 향약으로 이어오던 공동체의 미풍양속이 현대 사회에 접어들며 산업화와 개인주의, 핵가족화로 인해 사라짐에 따라 사회 양극화와 주민 간의 갈등 등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아파트’라는 공동주택에 살면서도 이웃이 누구인지 모르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안타까워한 지역민들은 더불어 함께 사는 방법을 찾기 위해 다양한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다. 민-관 협력으로 이뤄지는 ‘마을공동체 사업’도 그 일환이다. 현재 우리 지역에 어떤 마을공동체가 있는지, 어떤 활동들을 하는지 매주 1곳의 마을공동체를 찾아 탐방해본다.<편집자주>

 

 

봉강면 당저마을에는 ‘할머니 집 지도’라는 아주 특별한 지도가 있다. 당저마을 할머니 20명이 지난해 마을공동체 사업에 참여해 만든 ‘할머니 집 지도’는 할머니들이 직접 유화를 배워 자신의 집과 마을을 표현한 그림지도로, 최첨단 3D 위성지도가 따라올 수 없는 개성과 역사를 담고 있다.

봉강면 당저마을회는 지난해 ‘우리 동네 지도는 나가 그려야’라는 주제로 광양시 중규모 마을공동체 사업을 진행했다.

포스코 은퇴 후 당저마을에 귀촌해 6년째 이장을 맡고 있는 조규홍 이장은 그림으로 마음을 치유하고 이웃과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이번 사업을 기획했다.

조 이장은 “대한민국의 농산어촌에 사시는 어머니들이 거의 그렇듯 우리 마을에 살고 있는 여성 어르신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못 먹고 못 배운 한과 마음의 상처가 많다”며 “이 분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삶의 여유와 인간애 등을 되찾게 해드리고자 고민한 끝에 미술 심리치료를 해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조 이장의 권유로 당저마을에 사는 할머니 20여명은 지난해 5월부터 9월 매주 수요일 오후 1시반~3시반 당저마을회관에 모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평생 붓 한번 잡을 기회가 없었던 할머니들이기에 전문 유화작가를 정기적으로 초청해 기본기를 교육했다. 초반에는 ‘내가 뭘 할 줄 알아’하면서 쭈뼛대던 할머니들이 점점 그림에 몰입하게 되면서 표정이 밝아지고 자신감이 높아졌다. 서로의 그림을 비난하고 비웃던 문화도 점차 긍정적으로 칭찬하는 분위기로 바뀌어 갔다.

그림 수준이 뛰어나진 않지만 집에서도 그림을 그려올 정도로 할머니들은 열정을 보였다. 내가 살던 동네, 집을 주제로 삼았기에 그림을 그리다 옛 경험들을 이야기하고 추억에 젖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물망천이나 검덕원, 서산정, 문성봉 등 현재는 사용하지 않지만 과거에 불렸던 지명들, 그와 관련된 배경 이야기들이 회자되면서 알려지지 않았던 마을의 역사가 반추되기도 했다.

호응도 좋고 긍정적인 변화가 여기저기에서 나타나 계획에 없던 전시회도 열게 됐다. 지난해 8월23일부터 25일까지 문화예술회관 1전시실에서 할머니들 작품 60점에 대한 전시회가 열렸다.

지도를 그린 할머니들은 모두 작가로 초청돼, 테이프커팅을 하고 스탠드 파티에도 참여했다.

할머니들은 아주 특별한 경험에 흡족해하며 작가가 된 자신이 자랑스러워 감격에 취하기도 했다.

그 경험으로 할머니들은 올해도 또 그림을 그리고 싶다며 마을공동체 활동 참여 의사를 밝혔다. 올해는 ‘자서전’에 도전할 계획이다.

조 이장은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만 자서전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이름도 없고 빛도 없지만 한 분 한 분 기억나는 대로 희노애락을 그려 자신의 삶을 표현할 기회를 준다는 게 할머니들께는 엄청난 경험일 것”이라며 “그림은 할머니들이 직접 그리고 마을에 문학하시는 분이 스토리를 입혀 한권의 자서전을 만들기로 했다”고 밝혔다.

코로나19로 인해 마을회관도 폐쇄되고 외부활동이 어려워 당장 시행은 어렵지만, 할머니들은 벌써부터 각자 연습을 하며 자서전 출판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이들은 작년처럼 전시회도 하고 조촐한 출판기념회도 할 생각에 들떠 있다.

조 이장은 장기적으로 할머니들과 마을 공동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가 자립할 수 있도록 에코백이나 도자기에 할머니들의 그림을 입혀 판매할 계획도 갖고 있다. 또 마을 광장에 프리마켓을 만들어 지역 소상공인들에게 판매처를 제공하고 할머니들도 ‘사업가’로 데뷔할 무대를 만들어 주고 싶은 소망도 밝혔다.

조 이장은 “시골 마을이다보니 컴퓨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혼자 거의 실무를 떠맡고 있지만 할머니들이 점점 행복해하시는 걸 느끼니 힘든 줄 모른다”며 “귀촌자로 원주민들과 갈등이 없이 지내기 위해서는 나를 내려놓고 동네 어르신들과 함께 호흡하며 마을을 위해 내가 먼저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최근 귀촌 귀농이 늘고 있는데 마을공동체 사업 등을 통해 이주민들이 원주민들을 도와 새로운 무언가를 발굴하고 만들어가면 시골도 발전하고 재밌어질 수 있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활동을 통해 마을공동체가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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