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성찰과 최선의 노력으로 세상을 위해 고매한 삶을 살아오신 분들의 지혜로운 말은, 기도나 독경처럼 내 몸과 영혼을 다독여 준다. 마리 퀴리는 “인생에서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단 이해할 필요는 있다”라는 말로 삶의 의미를 성찰해보라 한다. 나 또한 살아가며 붙들고 고뇌하며 즐기는 화두들이 있다. 그중에 나는 ‘눈물과 땀’을 이해하고 싶어 퇴고하며 산다. 모두 내 몸에서 나오는 분비물이지만 눈물은 세상의 이치와 물려받은 심성에 의해 나와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고 연결하는 공감의 촉매이다. 땀은 실존의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산다는 의미를 몸을 통해 스스로 느껴가는 행복의 원천이라 이해하며 살고 있다.

늦둥이인 나는 친구들의 할머니와 비슷한 나이의 어머니의 존재를 각인(刻印)하며 어린 날을 보냈다. 나는 소풍날은 물론 평일에도 학교를 찾아오는 친구들의 젊은 어머니를 부러워하진 않았다. 정작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고된 농사일로 어머니가 신음이 깊어지는 밤이면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꿈으로 베개를 눈물로 수북이 적시곤 했다. 그렇게 눈물은 나에게 가깝게 다가와 일상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시답잖은 드라마를 보면서도 몰래 눈물을 감추는 나는 집사람과 딸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했다. 그런데 요즘의 나는 눈물을 감사하며 살고 있다. 눈물은 안구에 각종 영양분을 공급하고 촉촉함을 유지시켜 준다. 그래서인지 나는 돋보기 없이 휴대폰이나 신문과 책을 읽는다. 분노에 의한 눈물과 달리 슬픔과 기쁨의 눈물 성분이 똑같다 한다. 나는 슬퍼 우는데 눈물은 기쁠 때처럼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며 사랑으로 감싸 준다는 말이 된다.

나이가 들면 모든 것이 부족해지고 쇠약해지는데 눈물만은 주책일까 은총일까 더 많아지는 것도 같다. 벗들의 노쇠해가는 모습을 보고 이별의 소식을 접할 때는 물론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나 열심히 살아가는 자식들과 건강하게 커가는 손자여 석들의 좋은 모습을 봐도 웬일인지 눈물이 난다. 문학과 예술의 본질은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공감을 통해 공존을 익혀가라 하고, 슬픔과 분노를 다독여 주며 이해를 하는 힘을 키워주는 것은 아닐까. 눈물 속에는 우애와 사랑, 존경과 감사, 관용과 공감, 성선설과 박애주의, 용기와 도전의식이 녹여져 있다. 눈물은 마지막 참회로 모든 것 내려놓을 때, 어떠한 가족애도, 남다른 우정도 같이 할 수 없는 죽음의 길까지도 위로해 주며 동행해 주는 삶의 유일한 반려자가 아닐까.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몸을 움직여 먹이를 구하고 짝을 찾아 번식을 하는 등 타고난 본능적 생물학적 자유가 가 아니란다. 원초적 한계와 갈등을 넘어 부단한 인격 수양을 통해 도덕적 상태 가 주는 평화로운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이 자유이며 이를 문명이 주는 진정한 자유라 말한다. 인류의 가장 훌륭한 소통의 사상가로 추앙받는 장자는 “자유란 내가 곧 너이고 네가 곧 나일 수 있는 세상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이라며 만물일체 론을 이야기하고 삶과 죽음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라 한다. 우리는 경사가 심한 코 재를 한 시간 정도 땀을 흘리고 헉헉거리며 올라 마침내 능선에 올라섰을 때 시원한 산들바람을 느끼며 뿌듯한 성취감 속에 자유감을 만끽할 때가 있다. 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땀의 소중함과 땀 흘림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공존의 가치와 진정한 자유에 도달하는 길이라 믿고 산다.

관절염에다 대상포진과 요로결석의 고통 속에서 힘든 농사일을 할 때에도 땀은 나를 위로하며 피로를 견디게 해주었다. 지리산이나 설악산 종주를 할 때나 히말라야 트래킹을 할 때도 땀은 나와 같이하며 용기를 주었다. 땀은 체온을 조절도 하지만 몸속의 노폐물을 배출해 맑은 호수가 산을 품듯 정신을 맑게 해 지혜를 품게 한다. 몸은 모공을 열어 하늘의 이치와 땅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피로를 내보내 몸을 회복시킨다. 인간의 상당수는 부유함으로 땀을 멀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은 기계화와 기술의 발달로 탐 흘릴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땀과 함께 인내심을 상실한 인간은 쉬 흥분하고 자기 절제력을 잃어가고 있다. 노동이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며 살아있음에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살기 위한 재화의 획득이라 여겨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탐욕으로 집과 통장잔고를 늘려가면서도 늘 부족하다며 우울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춥거나 덥거나 일 년 열두 달 산에 오르고 이따금 농사일을 하고 사는 나는 추위나 더위는 잊고 산다. 레이철 카슨은 “아는 것은 느끼는 것의 절반도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나이가 들면 더욱 그러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이야기, 따뜻한 봄볕, 나뭇잎들과 우정을 나누는 산들바람, 먼 산 위에서 졸고 있는 구름까지 어느 것 하나 눈물과 땀이 없이 제대로 깊이 있게 느낄 수 있을까. 남들이 기피하는 눈물과 땀을 지식이 아닌 느낌으로 이해하기에 정말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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