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백운산 둘레길 5코스(외갓집 가는 길)

□ 광양 백운산 둘레길 5코스(외갓집 가는 길)
□ 코스 : 백학동마을(주소: 광양시 진상면 황죽리 117-6)-웅동교-백암∙대리∙오동∙죽양마을-국사봉랜드(14.4km:약 5시간 소요)
□ 가이드 팁
♥ 출발점: 옥곡 버스정류장(시내버스 30번)- 06:00, 07:40. 10:20, 13:20, 15:00
♥ 트레킹 후 버스 타는 곳: 수평제(시내버스 31번)- 07:00, 08:20, 11:30, 14:00, 16:00, 18:40
□ 먹거리 : 메기매운탕, 탕수육, 짜장면 등 옥곡 5일장內
□ 볼거리 : 수어 호, 불암산성, 어치계곡,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 국사봉(편백 숲), 옥곡 국사봉랜드

백운산 둘레길 5코스 출발은 백운산 곶감이 유명한 백학동 마을(신황마을 어치계곡과 웅동마을로 들어가는 다리 위)에서 시작된다. 백학동은 통일 신라말 풍수지리설의 대가 선각 국사 도선이 지리산 청학동을 유람하고 섬진강 나루를 건너 백운산을 세세히 살펴본바 지리산 청학동은 천 석이 아름답고 푸른 학이 사는 절경에 있다는 도인들이 사는 이상향이요, 백운산 백학동은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계곡물에 백학이 사는 뛰어난 경치에 선인들이 사는 땅으로 백학이 동남향으로 하강하며, 황룡이 배를 지고 있는 형국으로 풍수해가 없고 황금의 수라 하여 만인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선계의 땅이라 지목하여 백학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출발점인 신황마을은 현재의 구황의 옛 지명인 황리 촌에서 1800년 말경 이곳에 있던 황룡사 주변으로 이주하면서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신황(新黃)이라 한 것으로 전해진다. 황룡사(黃龍寺)는 옛날 이 마을에 있었던 사찰인데 구전에 의하면 신라 시대에 상당히 큰 사찰로 많은 암자를 두고 있었으나 황룡사 터에 명지(名地)가 있어 사람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갖가지 수작을 부려 절이 불에 타 없어졌다고 한다. (참고로 백운산 등산로 7코스는 구황마을에서 시작된다.)

둘레길은 신황에서 웅동방면으로 6~7분 정도 차도를 따라가다가 신전마을을 만난다. 신전(新田)은 새로 개간된 밭 주변에 형성된 마을이란 뜻이란다. 신전에서 웅동으로 가는 길목에 멀리서 보면 바위가 마치 물고기의 비늘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비늘 바구가 있었지만 도로공사로 인해 훼손되어 지금은 계곡 주위에 흔적만 남아 있다. 둘레길은 계속해서 도로를 걷다가 웅동교 위에 걸음을 세우고 웅동교를 건너게 한 뒤, 잘 정리된 임도로 연결된다.

참고로 웅동교를 건너지 않고 2차선 도로를 계속 직진하면 도로 끝에 웅동마을이 있다. 웅동(熊)洞)이란 지세가 험하고 곰이 많다 하여 곰 골이라 부르며 풍수지리학상으로 마을형국이 곰의 모습을 닮았다 하여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웅동마을에는 전남 동부지역에 최초로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하여 2008년 광양시에서 건립한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에는 각층별로 한국선교역사, 광양지역선교역사,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순교자기념관에는 순교자 214명의 영정과 유물이 안치되어 있어 한국 기독교 선교역사의 애국정신과 순교 정신을 고증하고 있다. 기념관은 전시실을 비롯해 대예배실, 숙소, 휴게실 등을 갖추고 있어 교계 행사와 문화행사, 수련회 장소로도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 기독교가 전파되게 된 것은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일본으로 도망치려던 일본인을 인천까지 뒤쫓아가 죽였던 한태원 씨가 수배를 당하자 웅동마을로 피신했다고 한다. 하지만 광주에서 한 관리가 한태원 씨를 잡기 위해 이 마을에 온다는 소문을 듣고 마을 사람들은 한태원 씨를 숨겨두고 관리인을 잘 대접하자 어느 날, 관리가 도박을 일삼는 주민들을 보고 “광주에 가면 ‘야소교(예수교의 음역어)’가 새로 들어왔는데 이를 믿으면 도박을 끊을 수 있다”라고 하며 광주 양림동 책방에서 일하는 조상학 목사(1877∼1950·공산당에 순교 당함)를 소개한다. 이에 동갑내기(당시 40세)였던 박희원, 서병준, 장기용이 1904년 어느 날, 광주까지 3일 동안 길을 걸어가 조 목사로부터 복음을 접하고 웅동으로 돌아와 집 한 칸을 빌려서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복음의 시작으로 웅동교회가 광양지역 첫 예배당이 된 것이다.

둘레길은 웅동교를 지나 구불구불 산속 깊이 이정표를 따라 잘 정비된 임도로 부담 재를 넘는다. 부담 재는 진상면 웅동사람들과 옥곡면 묵백리 사람들이 넘어 다니던 고개로 조선 고종 31년(1894)에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켰던 동학혁명이 농민운동으로 확대되어 갈 때 우리 고장 농민들이 군사훈련을 했던 지역이란다.

바람을 안고 골짜기를 구부리듯 따라가는 임도를 20여 분 내려오면 백암마을이다. 백암이란 지명은 현재 마을회관 우측으로 깊숙한 계곡에 옛날에 백암사란 절이 있었는데 거기서 유래되었다고 하지만 이 지역 사람들은 잣나무가 많아 잣 밭골이라고 부른다. 잣나무는 소나뭇과로 잎은 침엽으로 5개씩 속생하며 경기도 가평과 양주, 강원도 홍천이 주산지로 우리나라가 원산지이다.

둘레길은 계속해서 2차선 도로를 따라 사동마을에 도착한다. 사동마을은 백암리·부두리·묵방리·삼존리와 병합하여 묵백리에 속한다. 사동마을 삼거리를 사자 목이라 하고 ‘삼존마을’이라고 적힌 푯말이 세워져 있다. 둘레길은 표지석에서 옥곡면사무소 방향(좌측)으로 약 2~3분 가다가 묵백 천 위에 놓인 철 다리를 건너 대리마을로 넘어가는 계단을 올라간다. 소나무 숲으로 덮인 숲길은 30분쯤 가다가 대리마을에서 올라오는 넓은 임도를 만나면 이정표를 따라 좌측으로 20m쯤 내려가면 오른쪽에 이정표가 또 있다. 그리고 다시 이정표를 보면서 오른쪽으로 진행하면 능선길이다. 능선길을 약 20분쯤 가면 바람재다. 옛날에 대리마을 사람과 묵백리에 사는 사람이 결혼을 하면 이 고개(岾)를 넘어 외갓집에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을 넘을 때면 바람이 세차게 분다하여 바람재라 하였단다. 바람재에서 둘레길 이정표를 따라 대리마을까지는 약 15분쯤 걸린다.

대리는 옥곡면에서 제일 큰 마을이라 하여 대리(大里)라 하였단다. 1914년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 면 소재지가 있었다고 하지만 192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면사무소가 옮겨졌다.

대리마을에서 오른쪽으로 2차선 도로를 5분쯤 가다가 둘레길은 마을과 마을을 이어가기 위해 오동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오동마을은 옛날, 마을 앞 하천가에 오동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오동정 또는 오동 쟁이라고도 부른다. 비가 많이 내려 홍수가 날 때도, 냇물을 건널 때도 마을 사람들은 오동나무로 교량을 만들어 이용했다고 한다.

오동나무는 현삼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교목으로 한국 특산 수종이다. 옛말에 '봉황새는 대나무 열매만 먹고 집은 오동나무에만 짓는다'라고 할 만큼 귀하게 여기던 나무였다. 또한 과거에는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 결혼할 때 그 오동나무로 가구를 만들어 보냈다고 한다. 그것은 복을 주는 상서로운 나무로 여겼기 때문이다.

오동마을을 빠져나온 둘레길은 2차선 도로에서 오른쪽으로 2~3분쯤 걷다가 좌측으로 국사봉 아래 위치한 죽양마을로 이어지는 농로를 이용한다. 죽양마을은 매화 난 골, 또는 매봉골이라고 하며 매화 낙지의 명당 혈이 있어 전국에서 장수마을로 유명하다. 죽양마을은 주변에 대나무가 많아 죽치, 대치, 대티라고 부르는 옛말이 있다. 죽양마을 건너편에는 백양마을이 있다. 백양마을에 옛날 내시였던 정 씨 일화가 전해져오고 있다. 정 씨는 건넛마을 대치(죽양) 사람들이 백양동(白楊洞)을 향하여 오줌을 누면서 조롱하니 화가 난 내시(內侍)인 정 씨가 사람을 사서 대치(죽양)마을의 정자를 베어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국사봉랜드 입구에서 둘레길 5코스는 걸음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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