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저마을 엄마들의 인생이야기

봉강면 당저마을에 오랜 기간 거주한 어머니 열네 분의 인생이야기가 2020 전라남도 마을공동체 활동 사업의 지원을 받아 ‘꽃詩로 피어난 엄마’로 출판됐다. ‘꽃詩로 피어난 엄마’는 김순남, 김순애, 박희자, 정차순, 주순남, 김외남, 곽옥례, 김복례, 김순임, 윤장순, 남윤애, 정홍련, 황인자, 박만심 씨의 인생이야기를 인터뷰한 후 이미루 작가가 글을 쓰고, 할머니들의 그림과 사진을 함께 담아 엮은 책이다.
암울하고 어려웠던 시절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거칠고 고단했던 여정을 악착같이 견디며 살아낸 숭고한 삶의 이야기를 함께 한다. <편집자주>

▲ 김순애 어머니

다정한 남편, 부전자전

나는 지금껏 크게 고생을 하거나 위기를 격은 일이 없던 것 같다. 너무 오래된 옛 기억의 모서리가 닳고 닳아버렸기 때문일까? 그저 자상한 남편과 시어르신들 덕에 나의 결혼 생활은 슬펐던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1948년 광양 봉강면 서평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21살의 나이에 당시 27세의 남편과 결혼해 봉강면 당저에 온 후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고 있다. 남편은 지금 80세인데 대체로 건강한 편이다. 남편은 다정한 성격으로 착실하고 흠잡을 대가 없는 사람이다. 나이 차이가 있어서인지 큰아들과 막내딸의 만남이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결혼 초부터 지금까지 내게 많은 사랑을 주었다. 한 번도 내 생일을 잊어버린 적 없이 매번 챙겨주었다.

아이들은 부모의 모습을 닮아간다고 했던가? 남편이 나를 잘 챙겨주고 위해주는 것을 보고 자란 아이들도 나를 많이 위해주고 챙겨준다. 나는 1남 3녀를 낳았는데 큰딸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양에 살고 있다. 특히 아들은 아버지의 다정함에 더해 특별하고 재미있는 일들을 꾸며 나와 가족에게 행복한 선물을 주는 재주가 있다.

가족들이 모여 아무 생각 없이 밥을 먹을 때에도 아들은 갑자기 장기자랑을 하게 하여 모두를 즐겁게 해준다. 한번은 내 생일이었다. 크리넥스 한 통을 가져오더니 나에게 티슈 한 장을 뽑으라고 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휴지를 쑥 잡아당겼다. 그랬더니 휴지 대신 굴비처럼 역어진 돈다발이 줄줄줄줄 나오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랐다. 그 순간의 행복한 여운이 오래 갔다. 아들은 평범한 것을 싫어하는 것처럼 항상 축하 자리나 모임 자리에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하며 행복한 기운을 가져다 준다.

내가 팔순 때였다. 도시의 크고 비싼 식당에서 가족 행사를 할 수도 있었지만 자녀들은 마을 어르신들을 대접하고 싶어 했다. 노인들이 멀리 시내로 나오기 어려운 점을 감안해 당저마을회관에서에서 잔치를 해주었다. 이때 아들은 그동안 비밀리에 배워 연습한 마술을 보여주었다. 어설픈 점도 있었지만 동네 친구들도 아들의 마술쇼에 즐거워했다. 아들은 광양에서 직장을 다니지만 당저마을청년회장직을 맡고 있어 마을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어머니 같은 봉강

나는 봉강면 서평 출신이다.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막내로서의 특권을 누리고 자랐다. 술, 담배를 안 하시는 아버지는 다정다감한 분이셨다. 막내인 나를 특히 귀여워하셔서 늘 쓰다듬어주시고 팔 베게 해주시며 토닥토닥 거려주셨다. 맛있는 것이라도 있으면 “이거 우리 막내 딸 줘야지”라며 챙겨주시곤 하셨다. 얌전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와 형제자매들도 내가 막내라는 이유만으로 매사에 양보하고 예뻐해 주었다. 나는 그야말로 봉강의 공주였다.

이렇게 구김 없이 자란 내게도 청년시절이 오자 부러운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처로 나간 친구들이 명절 때가 되면 시골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물건들은 사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예쁜 옷이나 신발, 라디오 등 값나가는 물건들을 부모님께 선물하는 것을 보면 나도 빨리 돈을 벌어서 부모님께 좋은 선물을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일생일대의 타지 생활을 결심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하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에서의 생활은 견디기 힘들었다. 겨우 3개월도 못 채우고 나는 다시 고향 봉강으로 내려왔다. 봉강에서 휴식을 취하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몸과 마음이 회복되자 이번에는 친구들이 많이 내려가 있는 부산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부산에서는 친구들 덕에 외롭지 않고 견딜 만하였다. 점차 적응하면서 부산 생활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주민등록증을 재발급해야 하는 일이 생겨 고향 봉강으로 며칠 동안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겼다. 회사에 휴가를 내고 고향으로 왔다. 그러나 그 길이 영영 부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길이 되어버렸다. 과년한 딸이 객지 생활을 하는 게 못마땅했던 부모님은 잠시 고향으로 돌아온 나를 서둘러 결혼시켜버렸다. 훗날 전해들은 얘기로는 부산의 직장에서도 일 잘하고 착한 나를 많이 아쉬워했다고 한다. 아무튼 나는 짧은 객지 생활만을 경험해보고 지금껏 봉강의 품에서 한평생 살게 된 것이다.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고 인정이 넘치는 평화로운 나의 땅 봉강에서!

아버지의 도장

무너진 집터에서 찾아낸/ 아버지의 인감도장/ 빚 보증 잘못 섰다 날아간/ 큰 밭을 오래도록 바라보다/ 인주를 묻혀 도장을 찍어본다// 발자국이든 무엇이든/ 우리는 찍으며 한 생을 살아가는데,/ 돌아보지 못하고 멈추는 날이/ 찍는 일 끝내는 날이다// 목포의 어느 도장집에서/ 길인으로 새겼다는 검은색 뿔도장/ 주인은 간 지 오래여도/ 이름 석 자 생피처럼 붉다. (아버지의 도장, 주영국 詩)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갑자기 결혼하게 된 나는 다행히 착하고 다정한 남편을 만났고 따뜻한 시부모님을 만나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시부모님은 늘 “아가야, 아가야!” 하며 애정이 듬북 담긴 목소리로 나를 부르셨다.

시댁은 원래 해남이었다. 부농이어서 경제적으로 안정된 집이었다. 나도 결혼 초에는 해남의 시댁에서 잠깐 살았었다. 친정에서 공주로 자랐던 나는 농사일이 많은 시집생활이 무척 힘들었다. 그간 안 해본 농사며 살림살이를 손수해야 했는데 일이 손에 잘 잡히지도 않아 애를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빚보증을 잘못 선 시아버지로 인해 해남의 터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갈 곳이 없어진 우리가족은 빈 털털이로 친정이 있는 봉강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봉강으로 들어 온 뒤에도 시아버지는 빚보증을 몇 번 더 섰고 그때마다 우리가 갚아야 할 빚도 늘어났다. 그러나 그런 시련은 잠시 우리를 힘들게 했으나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남편은 다행히 얼마 후 면사무소 직원으로 취업을 했다. 나는 알뜰살뜰하게 남편의 월급을 모으며 농사일도 열심히 했다. 돈이 모아지자 대출을 받아 산과 논과 밭을 샀다. 산을 개간해 감나무를 심는 등 경제성이 있는 나무를 키우고 벼농사와 밭농사도 열심히 지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모으며 빚을 갚아나가기 시작하자 어느덧 대출금도 갚게 되어 결국 빚을 얻어 산 3천 평 정도의 대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곳에 감나무뿐 아니라 매실나무를 재배했는데 지금은 다래 농사를 짓고 있다. 이쯤 되면 시련을 있었으나 실패는 없는 생인 것 같다.

묘비명을 생각하는 시간

마을 회관에서 수업할 때 나를 상징하는 꽃을 그려보라고 했다. 나는 맨드라미를 그렸다. 고상한 자주빛 우단을 입은 듯 우아한 모습이 좋았다. 그리고 우리 농장에는 맨드라미가 많이 심어져 있어서 친근하기도 했다.

그림을 다 그리자 사람들이 웃었다. “위는 맨드라미인데 아래는 나팔꽃 같네”, “화분까지 그렸네. 잎사귀는 4개 구먼”, “이건 계단 같기도 하고 날개 같기도 하네” 제각기 감상평이 달랐다.

나도 내 그림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나팔꽃은 우리 가족 같다. 늘 환하게 웃으며 덩굴로 한 대 감겨 어울리는 우리가족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네 개의 잎사귀는 내 자녀들, 나는 한 화분 안에서 같이 있어 행복한 우리 집을 그려 넣은 것이다. 그들의 지지와 사랑으로 나는 우아한 맨드라미로 피어있는 것 같았다. 내 그림은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나는 내 묘비명에 이렇게 쓰고 싶어졌다.
- 아버지의 붉은 도장은 고귀한 맨드라미로 피어났다.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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