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자의 발로 뛰는 현장 답사

“동주나 내가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거든 이것을 연희전문학교로 보내어 세상에 알리도록 해 달라고 유언처럼 남겨놓고 떠났었다. 다행히 목숨을 보존하여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자 어머님은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던 동주의 시고를 자랑스레 내주시면서 기뻐하셨다”

   
     
왼쪽 윤동주 오른쪽 정병욱

 

민족 저항 시인이자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법한 시집을 남긴 개화기를 대표하는 시인 윤동주. 벌써 꽤 오래전이 돼 버린 내 고등학교 재학 시절 문학 교과서에 필수로 등장했던 그 이름.

나에게 윤동주는 색깔펜으로 줄을 긋고 내포적 의미를 달달 외워가며 언어영역 점수를 얻기 위한 수능과목 이상의 특별한 의미였다.

그 시절 나는 흔들리는 잎새에도 물먹은 꽃망울 터지듯 해사한 웃음으로 세상이 환했다가, 떨어지는 낙엽 한 잎에 흘러넘치듯 쏟아지는 감수성으로 깊은 고뇌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 이유도 모르는 끝없는 내적 방황이 충돌하는 질풍노도의 폭풍을 잠재웠던 것은 아마도 독서였던 것 같다.


사춘기라는 소용돌이와 목을 옥죄는 입시의 무게에서 유일한 반항이자 위안은 죽도록 싫어했던 수학시간에 선생님 몰래 수필, 시, 세계 명작, 국내외 소설들을 읽는 것이었다.

교단에서 들리는 피타고라스 정리나 행렬, 미분 등은 오른쪽 귀로 들어와 왼쪽 귀로 흘려 보냈다. ‘수학의 정석’은 깔끔하게 가림막 용도로 세워두고, 나는 문학 서적에 심취했다.

국내외 작가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탐독하며 활자를 읽어내려가다 보면 우연히 맞닥뜨린 영혼을 뒤흔드는 한 줄의 글에서 나는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꼈던 것 같다. 그때 내 무릎을 자주 차지했던 시집 중 하나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밤하늘 별이 아름다워서’, ‘바람에 가을 냄새가 묻어나서’ 등 이유는 늘상 있었다. 같은 책을 주기적으로 다시 읽는 습관은 이때부터 자리 잡은 듯하다.

지금도 외워서 낭송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들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안에 들어있다. 그러나 나는 시만 사랑했을 뿐, 윤동주 시인에 대해서는 수능시험을 위해 줄 긋고 외우던 고등학생 수준의 지식에만 머물러 있었다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고백한다.

윤동주 시인과 정병욱 교수의 시집 너머 숨겨진 이야기를 찾는 여정은 역사를 되짚어가는 과정이기에 아날로그적 감성을 더하고 싶었다.

나는 자차를 두고 대중교통을 선택했다.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 자리 잡은 광양의 조그만 바닷가 망덕을 관광객이 아닌 여행자의 눈으로 느끼고자 함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버스에 몸을 실었다. 자차 소유 후 시내버스를 탄 것은 10년도 넘은 일이다. 오래된 기억도 상황에 맞닥뜨리면 몸은 스스로 기억하고 행동한다. 마치 잊고 있던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면 나도 모르게 가사가 흥얼거려지는 이치일 것이다.

익숙한 듯 내 몸이 움직인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손잡이를 잡고 이동하며 내리는 문 쪽 가까
이 자리 잡고 앉는 것도, 먼저 탄 이들의 면면을 슬쩍 살피는 것도, 무릎에 가방을 놓고 무심히 지나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것도 예전 그대로다.

광양읍에서 출발했다는 11-2번 버스는 중마터미널에서 나를 싣고 금호주택 단지를 돌고돌아 태인도를 거치더니 대략 30분이 흐른 후 망덕포구 승강장에 덩그러니 내려놓고 멈춰섰다.

명절 연휴 중이라 승객이 없다며 여기가 버스 종점이라는 기사님의 친절한 설명에 감사 인사를 건네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섬진강 550리 물줄기가 바다와 만나는 망덕포구를 따라 조성된 강변 데크 산책로에 올라서자 햇볕이 수면 위에 부서지며 크리스탈 가루라도 뿌린 양 반짝임에 눈이 부실 정도다.

바다 위로 망덕포구와 배알도 그리고 배알도 수변공원을 연계한 현수 보도교 공사가 한창이다. 이미 배알도와 배알도 수변공원을 잇는 다리는 입체적이고 현대적 디자인으로 완공 상태며, 배알도에서 망덕포구를 잇는공사는 명절 연휴로 잠시 멈춘 상태였다.

시선을 옮기자 가로등 아래 ‘윤동주 길’이라는 표지판이 선명했다. 산책로를 따라 잔잔하고 평화로운 바닷가를 거닐며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옥 가옥’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400여미터를 내려가자 온갖 메뉴가 유리창에 빽빽이 적힌 횟집들 사이 휀스가 보인다. 한눈에 정병욱 가옥임을 알 수 있었다.


1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원형을 보존하며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었지만, 건축물이 너무 낡고 오래돼 ‘해체보수’ 방식으로 가옥 정비에 들어간 것이다.

휀스 밖에는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옥 가옥’임을 나타내는 안내문이 내부 건축물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우리 민족사 중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한글로 작성된 시고가 두 인물의 우정과 신뢰로 보존됨으로써 시집 간행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건축 구조와 국문학적 의미를 피력하고 있었다.


재정비되는 가옥은 지상 1층 102.3㎡로 국비와 도비를 포함, 사업비 3억9200만원을 들여 정비 중이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면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성찰의 시인 윤동주와 정병욱의 이야기를 담은 이곳이 오는 6월 시민들 곁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정병욱 가옥이 본연의 의미를 간직한 채 어떻게 변화된 모습으로 새단장을 할지 기대하며 발길을 옮겼다.

윤동주 유고시집이 보관됐던 정병욱 가옥의 옛모습

다시 강변 데크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잠시 잔잔한 바닷가를 바라보며 천천히 올라가자 강변 데크 산책로는 이내 넓은 쉼터에 도달했다. 윤동주 쉼터라고 적힌 이곳은 시인의 출생부터 사망에 관한 사진과 상세한 설명이 적혀있어 누구나 그의 생애를 이해하기 충분했다.

데크 난간을 지지대로 쉼터 둘레는 시인에 관한 액자가 전시돼 있고 중앙에는 쉴 수 있는 의자가 있어 쉼과 앎이 공존했다.

더불어 쉼터 계단 아래는 황병학의병 전투지였다는 안내판과 함께 1908년 9월 황병학의병이 어업권을 침탈한 일본인을 처단한 곳임을 함께 전하고 있었다.

윤동주 쉼터 건너편은 윤동주 시 정원이 조성돼 있었다. 공원 곳곳 돌에 아로새긴 윤동주의 대표 시들은 가옥을 둘러 쉼터를 두루 둘러봤던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 기분이었다. 정병옥 가옥을 통해 두 사람의 인연과 시집이 지켜질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았다면 윤동주 쉼터를 통해 시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정의 마지막 윤동주 시 정원을 둘러보자 시 하나하나가 더 깊고 소중한 의미로 다가왔다.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는 찰나, 윤동주 쉼터에서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비석이 보였다. ‘광양 선소터’라고 적힌 커다란 글씨 아래 전라좌수영 수군 주둔지라는 글도 함께였다.

비문은 이순신 장군이 바다를 누비던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영 수군이 배를 만들었던 곳이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해변 데크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많은 것을 배우고 알게 됐다. 윤동주 시인과 정병욱 가옥과의 인연을 찾아 떠난 길에서 시인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광양의 과거와 현재까지 둘러본 것이다.


망덕포구는 현수 도보교가 완성되면 배알도 수변공원과 더욱 가까워지며 현대적이고 세련됨을 갖추고 관광객을 불러모을 것이다.


정병욱 가옥 역시 새 단장을 마치면 관광객들이 편리하게 둘러볼 수 있는 시설을 갖출 예정이다. 현대적 편리함과 정돈되는 풍경 안에 역사가 주는 의미와 아날로그적 감성을 잊지 않길 바래본다.

망덕포구의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되, 잠시만 복잡한 생각은 잊고 긴 해변데크 산책로를 따라 걸어보길 권한다. 가벼운마음으로 길 떠난 여행자처럼 말이다. 작은 바닷가 마을이 담고 있는 깊이 있는 과거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집 원본

별 헤는 밤(종결부)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우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버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던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
(一九四一.十日.五)

기자가 고른 망덕 추천 코스

핵심만 콕콕! 망덕 강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서 관람가능해요.

1. 망덕 바닷가와 배알도 수변공원을 잇는 공사 진행이 한창이다. 완공되면 천혜의 자연과 어우러진 관광지로 발돋음 할 것으로 기대된다.

2. 이달 6월 새단장을 마치는 윤동주 유고보존 정병옥 가옥. 공사 진행 중이라 둘러쳐진 휀스에는 사진과 글로 가옥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3. 시인의 생애를 한눈에 알 수 있으며 관광객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윤동주 쉼터

4. 윤동주 시 기념공원은 윤동주의 생애를 적은 벤치와 곳곳에 시인의 작품들이 돌에 새겨져 있다.

5. 망덕포구에는 임진왜란 때 군용 배를 만들던 선소터가 있다.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