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우리 어머니는 옛날 광양군 골약면 와우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두 딸에 이어 세 번째 딸을 본 외할아버지는 이제 더 딸은 마지막이라는 의미로 황 또여무(又女無) 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단다. 거짓말처럼 어머니 다음으로는 두 남동생이 태어나 어머니는 운명적으로 효를 행하고 순종과 배려의 심덕을 실천하며 사신 것 같다. 91세 아버지 곁으로 떠나실 때까지 크게 화를 내시거나 남과 다투는 모습을 나는 보지 못하며 자랐다. 요즘 며느리나 딸아이와 달리 어머니는 나에게 말이 별로 없으셨다. 어린 나이에도 온화하게 봐주는 눈빛의 기대를 생각했을까. 따먹으면 문둥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도 나는 달콤한 명(목화) 다래를 따 먹지 않고 참았고, 풀섶에 숨어있는 호박을 용케 찾아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렸다. 공부야 소를 먹이는 등 농사일을 돕지 않으면 스스로 틈틈이 했고 무도 간격을 생각하며 뽑아 심부름해 드리고 고추도 어머니 말씀대로 적당히 익은 놈을 솎아서 따다 드렸다.

나는 막둥이로 태어나고 자란 추억에 젖을 떼면 인생은 약간은 팔자소관이라는 말을 믿을 때가 있다. 부모님과 형 두 분, 누나 두 분을 위로 모신 나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고생한 기억은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수학 문제를 푸는 데 집중하다 멍석에 널어놓은 보리가 소나기에 젖는 줄도 몰라, 모처럼 아버지가 매를 찾으며 호통을 칠 때 어머니가 다가와 귀 뜸 하셨다. “너를 차마 때릴 수 없어 엄포 중이니 도망가라는 뜻이다” 나는 시킨 대로 자리를 피해 매를 맡지 않았다. 식구 중 유일하게 작은형이 군밤을 줄 때가 있었으나 나는 아프지도 서럽지도 않았다. 나는 언제나 우리 가족이 너무나 나를 사랑하고 귀여워해 그저 다독여 준다 생각하며 개선장군처럼 자랐다.

매보다 무서운 것은 다른 친구들의 할머니와 비슷한 연세의 어머니가 “내가 우리 막둥이 스무 살 먹을 때까지 살까” “우리 막둥이 장가갈 때까지 살아있을까”하는 흘리는 말씀이었다. 생각하고 또 써 봐도 잊히지 않는 아리지만 소중한 추억이 있다. 농사일로 고된 하루를 보낸 어머니가 깊은 신음을 하던 밤이면 나는 어김없이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꿈을 꾸었고 눈물로 베개를 수북이 적셨다. 잠에서 깬 후 어머니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안심을 하며 어머니의 마른 가슴을 꼭 붙들고 잠을 다시 청하는 버릇이 여덟 살까지 계속되었다. 집사람과 딸들의 말대로 정은 별로 없으면서 주책없이 드라마만 봐도 제일 먼저 눈물을 보이는 남자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눈물 덕일까? 이 나이에도 친구들과 달리 안경을 쓰지않고 신문이나 책을 보며 이 또한 어머니의 은혜라 생각하며 산다.

밥풀 먹인 삼베적삼 곱게 다려 입으시고 호박 새끼와 무단을 이고 당산 모퉁이 돌아 오일장으로 행하시던 어머니. 돌아오시면 지전 몇 닢을 학용품 사라며 내 손에 꼭 쥐여 주시던 나의 어머니. 참외 장사 찾아오면 간절한 내 눈빛을 거절하지 못하고 어려운 살림에도 보리 한 됫박 퍼주고 참외를 사주시던 어머니. 그 무더운 한여름에도 불을 때서 꽁보리밥 한 솥과 속이 쓰리다는 아버지를 위해 밀가루 풀대 죽을 별도로 끓이며 온몸에 땀띠 한 겹을 입고 여름을 보내신 어머니. 봄이면 쑥과 취나물을 찾아 백운산 골짝을 헤매고, 여름이면 초남 앞바다 모래밭에 젊음을 묻으며 찔룩게(칠게)와 재첩 개발하느라 등허리가 허물벗기로 성한 날이 없던 어머니. 여덟 명을 낳았으나 자식 변의 맛을 보고, 자라 따는 집(민간 의료) 대문을 한밤중에 무수히 두드리고도 세 명을 앞세우며 피눈물의 세월을 논밭 매기와 길쌈으로 이겨내신 어머니. 손끝이 섬세하셔서 마을 사람들 눈에 티가 들어가면 바늘 끝으로 티를 내주고 내 눈에 티가 들면 혀끝을 눈에 넣어 티를 내어주시던 어머니셨네. 별명이 왜가리 이샌 인 아버지는 시 때 가리지 않고 큰소리로 많은 걸 요구하셔도 어머니는 불평 한번 하시지 않으셨다.

생전에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며 나는 칠십 넘은 지금도 철부지 아이로 남고 싶고,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 저세상 어머니 뵈면 칭찬 듣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마는 어머니의 삶을 보고 자라며 치매는 배려와 희생과 화를 참는 인내하는 삶에는 범접하지 못한다고 나는 굳게 믿고 산다.

백 마디의 꾸지람보다 미소 품고 침묵하며 믿어주는 사랑의 눈길이 나를 다독여 키운 이유 때문일까. 늦게나마 고마움과 감사함으로 평화로운 여생을 보내고 있다. 막둥이가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는 주위의 칭찬에 그저 옆에 같이함이 효도의 전부로 생각해 외로우실 때 대화 자주 나누어 주지 못했고 팔다리 따뜻하게 주물러 드리지 못한 아쉬움이 지울 수 없는 후회로 남아있다. 연세 들면 으레 그렇다는 의사의 말에 큰 병원 한번 모시지 못한 아쉬움 또한 후회된다. 자식들에 불편 주지 않으려고 연세가 드시면서도 일손을 놓지 않으시고, 드시는 것은 줄여가고, 몸을 정갈하게 유지하신 어머니의 노력이 일생을 그렇게 해오듯 막둥이를 사랑하는 인자한 평화로움으로 영면의 길 드셨으리라 믿으며 오늘도 그저 눈물만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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