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저마을 엄마들의 인생이야기

봉강면 당저마을에 오랜 기간 거주한 어머니 열네 분의 인생이야기가 2020 전라남도 마을공동체 활동 사업의 지원을 받아 ‘꽃詩로 피어난 엄마’로 출판됐다. ‘꽃詩로 피어난 엄마’는 김순남, 김순애, 박희자, 정차순, 주순남, 김외남, 곽옥례, 김복례, 김순임, 윤장순, 남윤애, 정홍련, 황인자, 박만심 씨의 인생이야기를 인터뷰한 후 이미루 작가가 글을 쓰고, 할머니들의 그림과 사진을 함께 담아 엮은 책이다.
암울하고 어려웠던 시절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거칠고 고단했던 여정을 악착같이 견디며 살아낸 숭고한 삶의 이야기를 함께 한다. <편집자주>

▲ 김순임 어머니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의 결혼

난리 통에도 난전은 생겨나고 집을 짓고 장가를 가고 시집도 가고 아이들은 태어난다. 내가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6·25전쟁 발발 후 얼마 되지 않은 전쟁 통에서 중매결혼을 하였다. 내 나이 20세, 남편의 나이는 23세였다.

6·25 동란이 터지고 서울이 함락되고 폭격기와 총탄이 난무한다고 했지만 내가 살던 고향은 시골이라 그랬는지 전쟁 초기라 그랬는지 전쟁의 기미를 잘 느낄 수 없었다. 아무튼 그런 전쟁 통에서 우리 집에는 초례청이 차려졌고 나는 혼례를 올렸지만 시댁으로 향하는 길을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빨치산들이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라 혹여나 공격을 받거나 납치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혼례를 치르고 바로 시댁으로 향했지만 만일을 대비해 남편과 나는 다른 길을 통해서 가기로 했다. 남편이 나보다 시댁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나는 공설운동장이 있던 곳으로 돌아 돌아 시댁이 있는 당저로 들어왔다.

혼례식 다음 날이었다. 마을에서 남자들을 집합시켜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이틀이 지나자 돌아온 남편은 다시 지서로 가서 생활하게 되었다. 빨치산들이 마을로 내려와 남자들을 죽이거나 납치해간다고 했기 때문이다. 집에서 지내는 것보다 지서에서 지내는 것이 더 안전했기에 남편은 오랫동안 지서에서 지내야 했다. 그 후 몇 년간 나는 남편을 볼 수가 없었다.

아내의 노래

혼례를 올린 다음 날부터 나는 남편과 함께 있지 못하고 각자 떨어져 생활해야 했다. 근 5년간 남편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고향을 막 떠나와 낯선 곳에 왔지만 아무도 나의 그늘이 되어주지 못했다. 시댁 식구들도 역사의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면서 나를 특별히 보살피거나 배려할 경황이 없었다. 다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에도 힘겨웠던 세월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빨치산반란군들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우리는 동네 주민들과 함께 옥룡에 있는 어느 산자락으로 도망쳐야 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그렇게 며칠을 추위와 공포로 떨던 중 그들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그들은 집 여기저기를 마구 뒤져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가 버렸다. 그중에는 내가 시집올 때 해온 원앙금침도 있었다. 엄마가 정성껏 꿰매고 수놓아 마련해준 고운 이불이었다. 남편과 같이 덮어보지도 못했는데 그들은 나의 신혼을 마구 짓밟아 버리고 새색시의 연분홍 마음에 검푸른 멍을 남겨 놓고 가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었다. 솔 나무껍질을 삶아 먹으며 우리는 버티었다. 빨치산반란군이 물러가자 이번에는 군인들이 반란군을 잡아들인다며 시댁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래저래 우리는 힘든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 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 <김경미 시, 비망록 중>

누군가가 남편과 나의 결혼 초년 운이 안 좋다고 말했다. 둘 사이에 처음 5년에 공방살이 끼어있어서 같이 살지 못한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역사의 회오리 속 모진 칼바람에 휩쓸려 신혼 초 5년간을 각자 떠돌다가 재회했으니 그 말이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렇지만 전쟁의 시기에 결혼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난리 통에 많은 사람이 죽었거나 이산가족이 되었겠지만 우리는 다시 만났으니 그나마 나쁘지는 않은 것이다.

아내 노릇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사라져버린 신혼을 보상이라도 하듯 시댁에서는 우리를 바로 분가시켰다. 나는 신혼의 단꿈에 젖어 아름다운 노래를 흥얼거리지도 못해보고 또 다른 벌판을 향해 가야만 했다.

작은 기억들

나는 지금 90세이다. 내 평생 가장 큰 기억의 조각들은 전쟁 통에 겪은 일들이어서 다른 일들은 그저 작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는 광양 세풍리 해두 출신으로 3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매우 엄하신 분이었다. 딸들이 밖에 나다니는 걸 몹시 싫어하신 부모님 덕에 우리들은 거의 집에 갇혀서 지냈다. 친정어머니는 얌전하고 조용한 성격이셨다.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은 친정엄마가 딸 셋을 연거푸 낳고 아들을 낳지 못하는 바람에 할머니로부터 “아들도 못 낳는다”, “집안에 대가 끊기게 생겼다”는 소리를 자주 듣고 살았던 일이다. 엄마는 속상해하며 뒤안에 숨어서 여러 번 울었다. 나는 엄마가 숨어서 흐느끼는 것을 보면 내가 딸로 태어나서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아주 어릴 때였지만 기억에 남아 있다. 엄마는 네 번째 출산에서 다행히 아들을 낳았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뒤였다. 아들 손자 복이 없는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할머니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엄마는 아들 둘을 더 낳았다.

시댁에서 제금을 낼 때 논 두 마지기를 주었다. 그것으로는 근근이 살아가도 힘들었다. 남편은 돈이 되는 일은 마다하지 않고 다 하는 생활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우리 집 논뿐 아니라 다른 집 논농사도 지어주고 여러 가지 일도 봐주며 그렇게 열심히 살아내며 우리는 2남 4녀를 키우고 가르쳤다. 큰아들은 해군에 군무하고 있는 직업군인이다. 작은아들과 넷째 딸은 광양에 살며 자주 나에게 들리며 보살펴주고 나머지 세 딸은 서울에 살고 있다. 없는 살림이어서 제대로 된 뒷바라지를 해주지도 못했는데 아이들이 착실하게 잘살고 있어 행복하다.

묘비명을 생각하는 시간

내가 좋아하는 꽃은 코스모스이다. 가녀린 코스모스가 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리는 것을 보면 작고 가는 나를 닮은 것 같아서 자꾸 눈길이 간다. 나는 가녀리고 약하게 생겼지만 전쟁과 빨치산을 견디면서 살아남았고 큰동서가 일찍 세상을 뜨자 시부모님 병수발을 들며 힘든 일을 모두 감당한 보기보다 강인한 여자이다.

- 전쟁 통에 혼인했다. 두려움이 없게 되었다.
강인해진 한 잎의 여자가 남았을 뿐이다. -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은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오규원 시. 한 잎의 여자女子>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