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를 듣는다 - 송재학

빗소리를 듣는다-송재학

마침내 등뼈뿐인 물고기 닮은 비가 쏟아진다
우리는 빈집의 빗소리를 되살리려 한다
모멸스런 날을 씹는 대신 핏빛 돼지고기를 사고
술을 모은다
우리 모두 빈집이 기다리는 말없음 쪽으로
쓸쓸함이 배웅하는 건너편으로 간다
대나무는 쪼개지고 빗줄기는 사나워진다
번개가 산의 능선을 다 훑어도 우리들 얼굴 구석구석은
다 보이지 않는다
허지만 쇳소리가 쟁쟁거리기를,
온몸의 뼈가 청동으로 바뀌어

칼 차고 말 타고 비옷듯 쏟아지는 화살 속을 달리기를!
빗물은 슬금슬금 스며들어와
녹물 번져서
몸 여기저기 대못 박힌 것을 알겠다

담장의 접시꽃은 조금씩 다른 우리의 내면,
수류탄 터지듯 활짝 핀 산벚나무가 이제 숨죽이면
그 틈으로 빗소리가 우리를 휘몰아 가는 구나
우리들로부터 쏟아진 것들이 흙탕물과 합쳐서
살여울 시작하듯
또 누군가 독백을 뱉어내듯
탓하지 못할 벌레들이 무작정 불빛으로 모여든다
어찌해도 빗방울 털지 못하는 거미줄처럼
이 하루마저 불안하여
잘 익지 않는 몽롱한 돼지고기는
식욕조차 달래지 못한다
몸 어딘가 빈집처럼 비가 새는데
몸 어딘가 쇠붙이들이 부딪히는데

시인 송재학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6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1994년 김달진문학상 외

1988년 시집 <얼음시집> 외

 

밤의 문고리를 열고 잠으로 들어간 직후부터였던가 봅니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시작했지요. 아마도 이 소란스러운 장대비가 그치고 나면 필연코 여름이 올 모양입니다.

봄과 여름의 경계가 모호하던 한때가 아주 잠깐 우리 곁에 머물렀으나 이제 곧 원추리도 피고 개망초도 피고 접시꽃도 피는 시절이 올 것입니다. 백운산 기슭마다 물소리도 제법 몸을 불리겠지요.
하수상한 시절이 오래도록 우리 속 깊은 곳까지 저미게 들어와선 잔뜩 성이 난 듯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 있으나 거리를 떠돌던 노숙자처럼 그도 물러나는 법을 알아 때가 되면 저문 그림자를 따라 문밖을 나설 것입니다.

문득 이리도 신소리를 내뱉고 마는 것은 장대비가 쏟아지는 새벽녘에 괜스레 깨어 몰려드는 상념 때문이지요. 과히 크게 나무라지 마시길 바랍니다.

어디 녹물 번지듯 우리가 걸어온 길 위에 비 새는 구멍 몇 개쯤 없겠습니까. 또 어딘가에선 부서진 쇠붙이들이 서로 깨어진 소리를 내기도 하겠지요. 우리로부터 쏟아진 것들이 흙탕물과 합쳐져 살여울을 시작하듯 시간과 시간을 건너서 가다 보면, 그리 그렇게 가다 보면 좀처럼 아물지 않을 것 같은 생채기도 청동처럼 굳어가기도 할 것입니다.

제법 많은 비를 뿌리고 지날 것이라는 기상예보는 모처럼 딱 맞아떨어졌네요. 몸에 들어온 애기보살이 처녀보살 되기도 전에 훌쩍 몸을 떠난 것처럼 영 믿을 게 못 되더니 말입니다.

가끔 하늘을 쪼개어 천둥이 치고 있네요. 대나무를 쪼개는 빗물이 사나워지고 있기도 하고요. 모쪼록 몸속에 슬금슬금 들어온 빗물을 잘 흘러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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