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陽에 살았던 史람들이 만든 이야기-⑩

통일신라시대, 광양에 불교가 들어오다

4세기 후반 백제에 불교가 전래되었지만, 왕실과 귀족 중심의 불교여서 백제의 변방에 해당하는 광양에까지 불교가 전파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전남지역에서 백제의 사찰은 문헌으로도 유적으로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백제 불교의 남방한계선은 전북 정읍과 익산으로 판단되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전남동부 지역 불교문화의 중심지로 등장한 곳은 지리산 지역이었다. 8세기 중반 경덕왕 때 경주 황룡사 소속의 연기 스님에 의해 화엄사가 창건되었고, 이후 화엄사는 지리산 주변 지역의 불교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광양지역에서는 구례 화엄사의 영향을 받아 옥룡사, 중흥사, 운암사, 송천사, 망해사 등 여러 사찰이 개창되었다. 이 중 광양 불교의 중심 역할을 한 사찰은 도선국사가 35년간 주석한 옥룡사이다.

옥룡사는 도선국사가 주석하기 전 이미 고찰이 있었다는 기록과 옥룡사 발굴 조사 결과 출토된 기와 조각으로 미루어 볼 때 창건시기가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이때가 바로 광양에 불교가 전래되어 정착된 시기이다.

▲ 중흥산성 쌍사자석등(현 국립광주박물관 소재)
중흥산성 3층석탑
광양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불교유물은 중흥산성의 삼층석탑과 쌍사자석등이다. 먼저, 보물 제112호로 지정된 중흥산성 삼층석탑을 살펴보자.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불국사 삼층석탑을 계승한 이중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려놓은 양식이다.

하지만 불국사 삼층석탑과는 달리 탑의 기단부와 탑신에 많은 장엄 조식이 있다. 상층 기단의 각 면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앞면에는 인왕상 2구, 양 측면에는 사천왕상 2구씩, 뒷면에는 공양상 2구를 조각하였다. 1층 탑신의 각 면에는 여래상을 1구씩, 즉 4방불을 볼륨감 있게 돋을새김해 놓았다. 이렇게 장엄 조식이 많은 석탑은 9세기에 유행하였다.

옥개석의 처마는 1 ․ 2 ․ 3층 모두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반전되며, 옥개받침은 3단이다. 옥개석의 끝에는 풍령을 달았던 구멍 흔적이 남아 있다. 탑의 상륜부는 노반 위에 보주만 남아 있고, 복발 ․ 앙화 ․ 보륜 ․ 수연 ․ 찰주 등은 사라지고 없다.

▲ 중흥산성 삼층석탑
중흥사의 삼층석탑은 9세기 통일신라 희양현에 살았던 사람들의 종교가 그동안의 토착신앙에서 불교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중앙의 지방 지배가 단순한 정치적 지배를 넘어 종교에까지 확장되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중흥산성 삼층석탑 1층 탑신부에 돋을새김 된 사방불은 왕이 곧 부처인 시대에 왕의 통치력이 광양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형상화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찍은 사진을 보면, 이 탑 주변에는 원래 4마리의 돌사자가 배치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사자를 탑 주위에 배치하기 시작한 것은 경주 남산 탑곡 조상군 북면 7층 ․ 9층탑에서 비롯되어, 분황사 모전석탑, 불국사 다보탑, 의성 관덕동 3층석탑, 구례 논곡리 3층석탑 등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탑 주위에 배치되던 사자상이 기단부 네 모서리로 들어가서 머리로 탑신부를 받친 탑이 바로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이다.

중흥산성 쌍사자석등
국보 제103호로 지정된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은 간주석을 사자상으로 대치한 특이한 모양의 석등이다. 원래 3층석탑과 함께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반출된 이후 여러 곳을 전전하다 1990년 이후 국립광주박물관 1층 중앙홀에 전시되고 있다. 현재 옥룡면 중흥사에는 모조품이 있다.

▲ 중흥산성 쌍사자석등(모조품, 현 중흥사 소재)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은 방형의 지대석 위에 8각의 기단이 있다. 기단 각 면에는 안상이 조각되어 있다. 하대석에는 단판의 연화문 8엽이 큼직하게 새겨져 있고, 그 위에 16엽 연화문이 조식된 간주 받침석이 있다.

보통 석등에서 8각의 간주석이 있는 자리에는 사자 2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마주서서 앞발과 입으로 상대석을 힘차게 받쳐 들고 있다. 사자는 신체의 골격과 근육, 이목구비와 갈기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양쪽 사자의 세부적인 형태는 조금 차이가 있다. 한 사자는 입을 크게 벌려 이빨이 선명하고, 갈기는 곱슬이며 꼬리는 둥글게 말린 상태이면서 허벅지가 다른 사자에 비해 굵은 편이다.

반면 다른 사자는 입을 벌리고 있으나 이빨이 보이지 않고, 갈기는 직모에 가깝고 꼬리털은 몇 가닥으로 나뉘어 표현되었다. 이렇게 조금의 차이를 보이는 두 마리의 사자는 아마 암 ․ 수 사자를 표현한 것 같다.

두 마리의 사자와 사자를 받치고 있는 받침석과 사자가 받들고 있는 상대석은 모두 한 돌로 조성되어 있다. 상대석은 16엽의 연화문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그 위의 팔각 받침대가 화사석을 받치고 있다. 화사석은 8각이며, 4면에 직사각형의 화창을 내었다.

화사석 내부의 아랫면은 등불을 놓을 수 있게 막혀 있고 윗면은 배기를 위해 뚫려 있다. 옥개석은 팔각 평면의 모임지붕이며 우동마루 끝에서 경쾌한 반전을 이루고 있다. 상륜부에는 연화가 장식된 보주가 놓여 있다.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의 조성시기는 3층석탑과 거의 동일한 9세기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사자석등으로는 충북 보은 법주사 쌍사자석등, 경남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이 현존하고 있다.
▲ 일제강점기 때 오가와 게이기찌가 찍은 중흥산성 쌍사자석등과 삼층석탑

미술품, 시대정신을 오롯이 담고 있다
지금까지 광양을 대표하는 불교 미술품인 중흥산성 3층석탑과 쌍사자석등을 살펴보았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사자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3층석탑에서는 탑 주변에 사자가 배치되고, 석등에서는 사자 두 마리가 직접 화사석을 받들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호랑이의 나라이다. 그런데 왜 사자가 등장하였을까?

사자는 삼국시대에 인도와 중국을 통해 불교와 함께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후 불교 석조물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백수의 왕인 사자는 불교에서 용맹한 기상으로 불법수호의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래서 불상의 대좌에서도 사자좌가 유행하였으며, 석탑의 주변에 배치되기도 하였다. 마침내 석탑 속으로 들어가 기단을, 석등 석으로 들어가 간주석을 대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자가 유행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 광양의 통일신라 불교 미술품에서도 사자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 1900년대 초반 유리건판 속 중흥산성 삼층석탑
광양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종교적인 미술품을 다루는 이유는, 예술 작품은 시대 상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만약, 중흥산성 삼층석탑이 삼국시대에 만들어졌다면, 분명히 석탑은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의 정림사지 석탑을 닮은 옥개석이 얇은 백제탑의 형태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경주로부터 전래된 불교의 영향을 받은 광양에서는 불국사 삼층석탑의 영향을 받은 신라탑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문자기록보다 더 정확하게 그 시대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미술 작품이다. 많은 문자기록이 정치적 승리자의 입장에서 후대에 조작된 기록임에 비해, 미술작품에는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그 시대의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