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에 다시 들여다 본 우리 지역의 여순사건
더불어ㅈㅊ학교 ‘여순10.19 광양의 흔적을 찾아서’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여순사건특별법)’이 내년 1월 공포·시행 예정이다.
여순사건 진실 알리기 운동 전개와 여순 10·19 범국민연대가 출범하는 등 희생자와 유가족들의 73년 피맺힌 한을 풀어 주기 위한 전방위적인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15일 광복절을 맞아 광양지역 참상을 되새기고 시민들이 앞으로 어떠한 역할을 해나가야 할지를 모색해보기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더불어민주당 순천광양곡성구례(을)지역위원회(위원장 서동용 국회의원)는 지난 15일 정치, 정책, 자치를 주제로 진행하고 있는 정치아카데 미 ‘더불어ㅈㅊ학교’ 현장 학습으로 ‘여순10·19 광양의 흔적을 찾아서’를 진행했다.

코로나19 방역지침을 준수하며 진행된 행사는 김정태 전 시의원의 안내로 구 경찰서에서 출발해 역사문화관, 반송재, 구랑실, 우두마을 입구 등 역사현장과 민간인 학살현장을 찾아, 여순 10·19 사건의 배경과 개요, 광양지역 내 진행 상황 등을 새롭고 깊이 있게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에 광양시민신문은 이날 방문한 장소 이동 경로에 따라 김정태 전 시의원의 안내를 지면에 옮긴다.

구 광양경찰서
‘더불어ㅈㅊ학교’ 1기 수강생 등 11명은 이날 오전 9시 옛 광양경찰서(현 광양문화원 옆 주차장 자리)에서 만났다.

김정태 전 시의원은 “여순 10·19 사건은 제주 4·3사건과 함께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빚어진 민족사의 비극적 사건으로,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 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했다”며 “우리 지역에서 양민들이 어떻게 희생당했는지, 역사의 현장이 우리 지역에는 어디 있는지 둘러보려고 한다”고 이날 현장학습의 출발을 알 렸다.

김 전 시의원의 설명에 따르면 구 광양경찰서 는 1948년 여순 사건이 일어나고, 광양의 양민들이 다 여기로 끌려와 갇혀 있다 트럭으로 몇몇 장소로 이송돼 학살당한 시작 지점으로 상징적인 장소다. 기정떡집 앞에 가건물이 감옥이었다.
이곳은 1945년 8월 15일 독립 다음 날인 16일 광양의 지도자들이 모여 해방 축하 군민대회를 준비한 장소이기도 했다.

광양문화원
1943년에 세워져 일본인이 광양군청으로 사용하던 광양문화원도 민간인 학살과 관련 있는 곳 이다. 삼진수도와 가교인력 사이에 들어가는 골목과 기정떡집, 대덕유료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연결된 부지는 원래 일제~해방 때까지 광장으로 사용됐다. 일본인들이 ‘화’자를 좋아해 광장 이름이 ‘화신광장’이었는데, 6·25가 끝나고 돈이 없어 개인에게 땅을 팔면서 건물이 들어서 지금의 모습이 됐다. 맞은편 ‘화신식당’만이 당시 광장 의 흔적을 담고 있다. 

당시에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공개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욕보이거나 공개 처형 등을 하던 공간으로 쓰였다. 전언에 의하면 이곳 큰 은행 나무에 실제 사람을 죽여서 매달아 놓기도 하고 잘라놓은 머리를 발로 차기도 했다고 한다. 

반송재
여순사건 첫 희생자가 나온 곳이다. 광양과 순천의 경계지인 이곳은 국도 2호선이 지나는 곳으로 반송재를 막 넘으면 나오는 현재 봉화공업사 뒤편에서 학살이 일어났다. 
사건의 시작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 14연대 중 1개 대대가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해 여수항에 집결했을 당시 남조선노동당 일원 지창수가 병기고와 탄약고를 장악하고 반대자 3명을 사살 하며 부대를 장악한 이후 20일 새벽 순천 통근열차를 타고 광양 방면으로 진격하면서다. 

19일 사고를 접한 광양경찰서에서 군대를 우습게 여기고 왔다가 이곳에서 첫 교전이 일어났다. 당시 국방경비대는 경찰의 예비대로, 경찰에 비해 열악한 무기를 보급받아 전력이 낮게 평가 됐다. 그러나 14연대에게는 제주도 진압을 위해 지급된 기관총과 M1소총이 있었고 이를 몰랐던 경찰들은 첫 교전에서 3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게 된다. 이를 보복하기 위해 첫 학살이 자행됐다. 광양에서는 1949년 9월 16일, 1951년 1월 14일 큰 두 사건이 벌어진다. 6·25 전후 광양에 내려온 사람들이 읍내 등 광양 전역에 불 지르고 사고치고 산으로 도망갔다. 그 관련자들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마구잡이로 광양사람들을 끌고 와서 죽였다. 그때 경찰서에서 이동했던 루트로 트럭 2 대가 오고, 한 번에 4~5곳을 거치며 대량학살을 했다.

이경모 작가가 반송재에서 학살당한 친구의 시신 수습 과정을 기록한 사진
이경모 작가가 반송재에서 학살당한 친구의 시신 수습 과정을 기록한 사진

광양출신 사진작가 이경모 선생이 친구 시신 수습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해 첫 학살로 인정받 은 곳이다. 당시 이경모 선생의 친구였던 故김영배 선생은 서울대학교를 다니던 중 결핵에 걸려 잠시 고향에 쉬러 왔다 변고를 당했다고 한다.

구랑실재
이곳은 원래 광양이었는데 순천으로 바뀌었다. 높은 재를 도로 때문에 깎아 지형이 많이 변했다.
실제 학살이 일어난 곳은 도로 건너편으로 보이는 단풍나무가 서 있는 언저리다. 6·25 발발 이 후 1950년 7월 26일 광양에 인민군이 진주하는데, 인민군이 순천을 거쳐서 내려온다는 소식에 7월 17일쯤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을 색출해 이곳에서 처형했다. 당시 사회주의 사상이 조금이라도 있었거나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서명 한 사람들까지도 모두 학살당했다.
7월 17일이라 는 날짜를 거의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향년 101세이신 김정태 전 시의원의 할머니의 목격 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은 청소골 출신이었던 할머니께서 친정에 아버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아들과 함께 이곳을 넘어가던 중 시신이 널려 있던 현장을 목격했다고 한다.
전언에 따르면 대 부분 고무신을 많이 신고 있었는데, 죽은 사람의 신발을 지게로 한 짐씩 짊어지고 갔다고 한다. 

우두마을
광양읍에서 봉강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위치한 우두마을은 소가 엎드린 모양 지형의 머리에 해 당된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6·25 발발 전 활동 하다 산으로 올라간 사람을 구빨치, 발발 후는 신 빨치라 불렀는데 여순사건 활동자들은 구빨치들 이다. 
우두마을 역시 1949년 9월 16일, 1951년 1월 14일 큰 두 사건의 학살지다. 골프연습장 위에 둑이 봉강저수지(백운재)인데 저수지가 생기기 전 지형상 가장 낮은 곳에서 사람을 4열로 줄 세 워놓고 우두마을의 당산나무 쪽에서 총살했다고 한다.

이곳은 광양읍과 봉강의 경계지로 당시에는 길이 좋지 않아 이곳부터 길이 좁아져 차에다 죽일 사람들 가득 싣고 가다 보면 속도가 느려졌다. 이 와중에 차에 타고 있던 사람 하나가 뛰어내려서 탈출해 산으로 도망가는데 경찰이 쫓아가서 사살 했다고 전해진다. 원래 이곳에서 죽이려고 했는지,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죽이려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탈출자가 사살되자 전원 하차시켜서 집단 사살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돌아가신 분들 역시 구 광양경찰서에서 출발한 사람들이었는데 특히 옥룡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김정태 전 시의원이 10여년 전 채록하면서 만난 당시 학살에서 살아 돌아오신 한 어르신은 “종 대로 세워놓고 타격하려고 하니 옥룡면 어떤 사람이 손을 번쩍 들고 ‘여기가 나 죽을 자리 인가 본데, 내가 세 가지 억울한 게 있다. 첫째는 부모보다 먼저 가서 억울, 둘째는 해방된 나라에서 뭘 해보지도 못하고 죽어 억울, 셋째는 빨갱이로 몰려 죽어서 억울하다’고 했다”고 전했다.

이날 탐방은 우두마을을 끝으로 마무리했지만 김 전 시의원은 “옥룡과 봉강 사이 가마고개(부현, 종이를 만들던 가마가 있던 동네)도 학살지, 중마동 가는 길에 거성주유소, 상수도 사업소 막 지나서 보이는 첫 주유소 쪽에서 큰길 넘어서 보 면 길이 하나 있는데 이 길도 학살지 중 한 곳이다. 또 중마동 쓰레기매립장 지나서 오르막길 오 르다 보면 송치재도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며 송치재에서 나와서 초남으로 가면 광산자리(현재 초남역 인근)와 세풍 검단재도 학살지”라고 설명 했다. 

이날 행사에 함께한 서동용 국회의원은 “광양 에서 여·순 사건의 흔적을 찾아가는 게 10여 년 전 시민단체에서 중심돼 진행된 것 외에는 거의 처음일 것”이라며 “여·순 사건이 여수나 순천의 피해를 중심으로 재조명되고 있지만, 광양이나 구례 쪽은 산과 인접해있어 산에 숨어든 잔당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을 것이 라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특히 광양은 빨치산이 먹을 것을 찾으러 내려왔을 때 먹을 것을 주고 길 알려주고 했던 인도적 차원을 부역으로 봐 고발당해 억울하게 희생당하신 분들이 많다”며 “한 골목 내 가해자, 피해자가 혼재돼 있어 그 누구도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하지 않아 진실규명에 어려움이 있다” 고 안타까워했다.

서 의원은 “고발한 사람, 처형에 가담한 사람이 가해자가 아니라 국가에 의해 자행된 폭력으로부터 모두가 피해자였다는 마음으로 이제는 드러내서 명확하게 진상을 조사하고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일들을 해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여순 특별법 통과로 관련 논의가 지역별로 활발해질 것인데, 광양도 이날 탐방을 시작으로 시민들이 여순사건에 대해 더 많이 관심을 갖고 활발한 논의를 통해 여순사건 관련지에 대한 안내판도 설치하고 기억할 만한 공간을 만드는 등의 주도적 활동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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