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도’ 사시사철 따뜻하고 넉넉했던 해산물
이주민과 소통하며 공존할 수 있는 방안 모색 필요

1. 광양의 보물섬 금호도 인문기행을 시작하며

예로부터 광양은 조선에서 가장 살기 좋은 지역으로 이름난 곳이다. 어사 박문수는 조선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전라도요, 전라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광양이다(朝鮮之全羅道全羅之光陽)’라고 했다. 이렇게 축복받은 땅 광양에 보물섬이 존재한다는 점에 대해 지역 기업들이나 시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잊혀 가는 옛 문화를 발굴해 현시대의 문화와 연계·보존·가꾸기·홍보에 앞장서야 한다. 이 글을 시작으로 급속한 산업화와 새로운 관광 인프라에 집중이 되어 잊혀 가는 광양의 보물섬 금호도의 옛 정취와 문화에 대한 관심의 부재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자 한다.

광양제철소는 고향을 떠나 육지로 이주해 생활하고 있는 금호도 이주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건설됐으며 오늘날 광양의 경제부흥과 도시문화가 형성됐다. 따라서 세계적인 철강기업인 광양제철소와 지역민이 하나가 되어 광양의 보물섬인 금호도 옛 정취와 문화를 발굴·보존·가꾸기·홍보를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선행돼야 할 것은 금호도의 옛날과 현재 문화에 대한 관광 인프라를 구축해 홍보하고 관광객과 지역민의 교육·홍보 자료 개발이 우선돼야 한다.

광양제철소가 건설되기 이전의 금호도
광양제철소가 건설되기 이전의 금호도

한편, 1983년 광양제철소가 착공된 이후 광양시 경제자립도는 전남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그 시너지 효과가 크다. 광양시의 경제자립도가 높아지고 지역민들의 삶이 윤택해지기는 했지만 자연환경 훼손이나 지역민의 이타적인 분위기 등 얼마간의 손실이 발생된 것은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화적 산물이기도 하다.

광양제철소는 광양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와 세계 철강 산업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기업이다. 광양제철소 건설 과정에서 최대한 구릉지나 둔덕 등 옛 금호도 자연 원형을 그대로 살려서 조경이나 주택을 건설한 것은 이주민들 입장에서 정말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원주민들이 생활하며 다녔던 길들을 이용해 도로를 만들었다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금호도 전체를 걸어보거나 배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돌아보면 이러한 감동이 피부로 느껴진다.

다만 금호도가 고향인 이주민들의 추억을 엿볼 수 있는 활로가 막혔다는 점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주민들은 이웃 고장인 광영동에 집단이주해 살고 있다. 이주민 1·2세대는 금호도 이주민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산다. 고향을 눈앞에 두고 그리워하며 살고 있는 금호도 이주민들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광양제철소와 광양시가 나서서 현재 금호도에 살고 있는 주민들과 이주민들이 함께 어울려 소통하며 하나의 공동체로서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번 연재는 이러한 목적과 필요성을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금호도 옛 역사 발굴·보존·홍보 및 광양제철소와 금호도 주민들의 삶을 조명하기 위한 작업이다.

1. 광양제철소가 건설되기 이전의 금호도

1)사시사철 따뜻하고 넉넉했던 해산물

광양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 백운산과 지리산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어 사시사철 기온이 온화하고 센 바람을 타지 않는 살기 좋은 고장이다. 광양제철소가 건설되기 전 금호도 원주민들은 김 생산과 굴 양식업, 그리고 고기잡이로 인한 경제자립도가 아주 높았다. 광양제철소가 건설된 이후에도 금호도 경제자립도는 전라남도에서 당연 1위이다. 따라서 광양제철소 건설 전·후를 통틀어 보았을 때 금호도를 광양의 보물섬이라고 칭해도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여름이면 해풍이 불어와 시원하고 겨울에도 따뜻한 기온이 보물섬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햇볕이 종일 비껴가지 않는 양지바른 섬이다. 광양제철소가 건설되기 직전까지 겨울철이면 오밀조밀한 항아리를 장식해 놓은 듯 늘어선 섬 주변으로 김 양식장이 장관을 이루었다. 김 양식장은 섬 주민의 경제적 보고였으며 생산량도 많아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넉넉한 살림살이의 재원 역할을 해줬다.

광양제철소가 건설되기 직전까지 금호도 원주민들은 겨울이면 김을 생산하고 봄가을엔 어패류 양식업을 했으며 여름이면 고기잡이를 하며 생활을 영위했다. 섬진강 하류에 자리하여 어패류나 김 수확하기에 적절한 환경을 갖춘 덕에 겨울이면 길거리에 다니는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물적 자원이 풍요로운 섬이었다. 섬마을 아이들은 보리밥을 먹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을 만큼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성장했다. 물론 빈부 차이가 심해 가난한 집 아이들도 많았지만 대체로 경제자립도가 높았던 섬이라서 먹고 사는 일에 힘들지는 않았다. 태풍도 홍수도 보물섬 주민들에겐 피해를 주지 않고 늘 가벼이 지나갔다. 겨울에도 기온이 따뜻하여 눈 쌓인 경치를 구경하려면 몇 년이 걸릴 정도이다. 아마도 주변을 감싸고 있는 나직한 안산과 내동마을과 대동마을을 거쳐 메산 끝까지 이어진 둔덕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름다운 풍광과 풍족한 바다 자원은 주민들의 사계절을 풍요롭게 해 주었다. 금호도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2) 금호도 이름 유래에 대하여

우도牛島(쇠섬)와 금도金島(쇠섬)

금호도라는 지명은 고려시대 때 기록이나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없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우도牛島라는 지명으로 처음 나타났다.

1740년경에 제작되었던 해동지도에도 우도牛島라고 표기되었던 것이다.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6전라도편에는 옥곡면에 속하였으며 우도촌牛島村이라는 고을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다가 1861명례궁수세절목1872광양현 지도에는 금도金島로 기록되었다. 1899년에 편찬된 돌산군지설명 편에도 금도金島또는 금호金湖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도牛島가 오늘날 금호도라는 명칭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돌산군에 편입된 1896년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우도牛島금도金島로 바뀌고, ‘금호도金湖島로 불리게 된 유래는 그 어느 자료에서도 정확한 정보를 찾을 수는 없다. 때문에 전해오는 말이나 상식적인 선에서 해석해볼 수밖에 없다. ‘우도牛島금도金島를 한자 뜻글자로 풀어 보면 쇠섬이다. 선인들은 소의 형국을 닮은 섬이라서 쇠섬(牛島)’이라고 이름을 지어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후세에 누군가 ()’라고 표현하였으며, 지역민들의 방언을 잘못 이해하여 '철을 뜻하는 쇠()', 즉 금도로 표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 광양제철소가 건설된 것은 선조들의 선견지명이 작용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이 점에 대하여 전설처럼 들어왔던 말이 있다.

그물 줍는 모습 (故 백두석 씨
그물 줍는 모습 (故 백두석 씨

금도(金島)’가 제철소가 될 것이라는 예견을 듣게 된 것은 필자의 부친인 고백두석 씨로부터였다. 고인은 금호도 도촌마을에 거주하였던 원주민이다. 고인은 고기잡이에 매우 능숙하여 다른 사람들이 빈 배로 들어올 때에도 늘 만선을 이루었을 정도로 고기잡이 귀재로 정평이 났었다. 오죽하면 숭어가 잠자는 소리도 듣는 사람이다.’라고 동네 사람들이 말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고인은 광양제철소가 건설되기 15년여 전에 이미 광양제철소가 설립될 것을 예견했다. 필자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금호도 한자는 쇠 금(), 호수 호(), 섬 도()’를 쓴단다. 그런데 예전에 이 섬의 이름은 쇠섬이었다. 도촌마을은 쇠머리에 속하고, 너희 윗대 할아버지 묘를 쓴 곳을 쇠모가지라고 부르는데 쇠섬이니까 쇠모가지 부분이 있었던 거지. 그런데 옛 어른 중 누군가 오독(誤讀: 잘못 해석)하여 ()’()’로 바뀌게 된 거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명이 바뀐 것도 우연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단 말이다. ()가 쇠()로 바뀐 것은 언젠가 이 섬이 분명히 쇳덩어리가 되든지 금덩어리가 될 거라는 선인들의 견해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말이야! 그렇게 생각되지 않냐? 언젠가 이 섬은 언젠가 쇳덩어리나 금덩어리가 될 거야.”라고 어린 딸아이에게 가끔 예언을 했다.

기가 막힐 노릇은 초등학생이었던 필자가 스물을 갓 넘을 즈음 정말로 광양제철소가 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졌고 1년 후(1983)에 공장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제철소가 들어올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시기에 고인은 지명으로 미래를 예측했던 것이다.

우도(牛島쇠섬)’였던 본래 이름이 금도(金島쇠섬)’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다시 금호도(金湖島)’라는 이름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렇게 바뀐 금호도라는 지명 유래가 현실과 맞아떨어진다는 고인의 예견은 쇠섬의 산업화와 맞닿는 말이다. 금호도 이주민 2세대 중에는 옛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현재의 지명이 산업화된 현실과 부합하다 할지라도 옛 지명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의견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다. 이 점에 대하여는 앞으로 계속하여 논의가 이루어져 합의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

·사진= 백숙아 광양문화연구회원
※이 글은 2020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사업 비를 지원받은 연구보고서 내용을 재구성한 것 입니다.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