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에서 내려오다
        이기철


고견사古見寺 운상선원雲上禪院은 꽃으로 덮여 있다
들과 산을 제 색깔과 향기로 채우는 일을
풀과 꽃 아니면 누가 할 것인가

사람 대신 꽃 이름 불러보고 싶어
예고 없이 산에 드는 사람의 마음을 아는 이 누구인가
달력의 5월은 아직 산중까지 오지 않아
물소리가 골짜기를 여는 데 아침나절이 걸린다

철쭉 지고 나니 설상화가 잎을 내밀어
덩달아 피는 꽃이 산을 무등 태운다
굴참나무 곁에서 바라보면 산이 꽃 향기에 실려
구름보다 가볍게 산 아래로 떠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꿩비름 노루발톱풀, 숨겨놓은 햇살이 솔그늘을 재운다

누가 이름하였는가, 운상선원雲上禪院엔 비가 오지 않을텐데
갑자기 몰려온 구름 송이가 후두둑 빗방울 뿌려
내 신명을 깨뜨린다
꽃은 산상山上에 피고 나는 하산下山해야 한다
때 절인 창자와 뇌수를 씻지 않고는 아무도
이 고산高山에 들 수 없다

나무 이름 꽃 이름 함부로 부르는 것도 내 거짓된 욕망이라고
바위를 스치는 바람 한 폭이 찢을 듯
내 옷소매를 당긴다

내려가라 내려가라 운상선원雲上禪院엔 오르기도
이렇게 힘겨운데
욕망을 숨긴 운동화 발로 어찌 선계仙界를 지나
하늘로 오를 것인가


※ 시인 이기철
-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 1972년 현대문학에 시 <오월에 들른 고향> 등을 통해 등단
- 자유시 동인
- 1974년 시집 <낱말 추적> 외 다수
- 1993년 김수영문학상 외
-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시인 이기철의 초창기 시에 대해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교양체험에서 생체험으로 나가는 흔적을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정당성 없는 정치권력이 자신을 지배하는 악몽같은 현실에 절망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굴종의 상태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소시민으로서의 지식인이르는 딱지가 그의 시에 고스란했지요. 

그 감정은 아마도 부끄러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달리 말하면 불의하고 불온한 시대를 건너가는 지식인으로서의 괴로움이 잔뜩 묻어난 게지요. 

그래서 이기철은 초창기의 번민을 벗어나는 한 방안으로 자연과 생태에 눈을 돌립니다.

특히나 지리산 자락에 파묻힌 고향 거창에서 청춘의 시절 내내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시대정신과의 마찰, 그 숨막힘을 내려놓고자 했지요. 

엄혹한 시대에도 자연에 사는 것들은 때가 되면 잎사귀를 틔우고 꽃을 내뱉어 놓으니 그 어떤 권력이 이 자연을 거스를 수가 있었겠는지요?

이기철이 자연을 향해 시선을 바투 둔 까닭은 바로 그것 때문이지요. 

그렇게 탄생한 것이 청산행靑山行이라는 시집입니다.

시집 청산 행에는 아까샤꽃, 복숭아꽃, 포플라, 등꽃, 풍매화, 홰나무, 안개꽃, 느티나무, 박꽃, 탱자나무, 보리싹, 풀꽃, 능금, 패랭이꽃, 봉숭아, 소 나무, 잣나무, 냉이, 칡순, 할미꽃, 살구꽃, 싸리꽃, 호박꽃, 도라지, 산두릅, 더덕잎 등 다 헤아리기 어려울만큼 수많은 식물이 자라고 또 꽃은 피고 집니다. 

이런 꽃이나 나무 같은 식물 외에도 생솔 냄새, 저녁연기, 따스한 숭늉, 귀뚜라미, 산가재, 말매미, 올챙이, 다람쥐, 개울물, 간이역, 농 로, 산길, 저수지, 염소, 실개천, 말똥구리, 염소, 잠자리 같은 등장하는데 언뜻 상상해봐도 참 순한 것과 그 순한 것들이 살만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아니들 수 없지요.

오늘 차려낸 밥상 위에 오른 <구름에서 내려오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밖에서 찾던 자연이 제 속에서 성찰되고 깊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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