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 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돼 건강한 탄부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 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작은 새가 돼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아
해 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간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 스톱도 급행 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던 새들의 날갯짓.
지난밤에 들리던 석탄의 변성變成 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는 눈 내린 숲속으로 빨려 가고
숲의 순수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移轉)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가 운반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飛翔 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 가는 불씨를 분다.


※시인 오탁번
-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 1985년 시집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외
- 1987년 제12회 한국문학작가상 외
- 1998년 평론집 <현대시의 이해> 출간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를 두고 흔히들 겨울 대표하는 서정 시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습니다.

이 시를 통해 오탁번은 만년의 시간을 붙잡고 늘어지는데 나무 가지 위를 덮은 적설積雪을 두고 우주의 존재, 그 궤적을 살펴내는 시각을 갖고 있지요.

동화와 시, 소설은 신춘문예 3관왕이라고들 하는데 오탁번은 1966년 동화, 1967년 시, 1969년 소설 등 신춘문예에 연달아 당선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 시는 그의 데뷔작이지요.
비록 좀체 눈 구경 하기 힘든 남녘이지만 겨울이 가기 전에 시의 이불을 덥고 누워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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