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섭


얼음을 등에 지고 가는 듯
봄은 멀다
먼저 든 햇빛에
개나리 보실보실 피어서
처음 노란 빛에 정이 들었다

차츰 지붕이 겨울 짐을 부릴 때도 되고
집 사이에 쌓인 울타리를 헐 때도 된다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가장 먼 데서부터 시작할 때도 온다

그래서 봄은 사랑의 계절
모든 거리가 풀리면서
멀리 간 것이 다 돌아온다
서운하게 갈라진 것까지도 돌아온다
모든 처음이 그 근원에서 돌아선다

나무는 나무로
꽃은 꽃으로
버들강아지는 버들가지로
사랑은 사람에게로
산은 산으로
죽은 것과 산 것이 서로 돌아서서 그
근원에서 상견례를 이룬다

꽃은 짧은 가을 해에
어디쯤 갔다가
노루꼬리만큼
길어지는 봄해를 따라
몇 천리나 와서
오늘의 어느 주변에서
찬란한 꽃밭을 이루는가

다락에서 묵은 빨래뭉치도 풀려서
봄빛을 따라나와
산골짜기에서 겨울 산 뼈를 씻으며
졸졸 흐르는 시냇가로 간다
 


※시인 김광섭
- 1905년 함북 경성 어대진 출생
- 1927년 와세다대학 내 조선인 동창회지 <알>에 시 <모기장> 발표
- 1933년 극예술연구회 가입
- 1938년 첫 시집 <동경> 출간
- 1941년 반일, 민족사상 고취 혐의로 체포, 3년 8개월 수감
- 1956년 한국자유문학자협회 회장
- 1958년 세계일보 사장
- 1969년 시집 <성북동비둘기> 출간 


봄비라 해야 할까요? 새벽에 일어나 연초가 간절하여서 올라간 옥상에는 수개월을 달려온 반가운 손님처럼, 수개월 동안 잔뜩 가 물었던 땅을 적시며 토닥토닥 비가 내리고 있었지요.

며칠째 살을 에던 추위는 어느 사이 종적을 감추고 옷깃 속을 넘나드는 바람에게서 봄 내음이 가득했습니다. 

불현듯 겨울 가뭄에 걱정을 내비치던 어머니의 얼굴이 잠시 머물 더군요. ‘가문 땅을 가문 눈으로 바라보던 어머니가 참 좋아하겠 구나’싶어서지요.

물 한 방울 스며들지 않는 마른 밭을 두고 어머 니는 3월이면 심어야 하는 고추 모종과 옥수수 씨앗 등을 두고 걱정이 자심하셨던 탓입니다. 

섬진강가뿐 아니라 햇볕의 땅인 광양 곳곳 어디서든, 온갖 지천 에서 매꽃이 벙글고 손톱만한 봄까치꼿이 앙증맞게 땅을 뚫고 얼굴 을 내밉니다.

굳이 비 오는 날이 아니더라도 바야흐로 봄이 오고 있던 게지요. 

그래서 떠오른 게 바로 김광섭의 시 <봄>입니다.
봄에 관한 시들 이 차고 넘쳐도 김광섭의 봄은 지고 피는 일들의 순환이 이 삶의 근원이라는 데 시선을 두고 있으니 으뜸은 못 되더라도 결코 만만 하게 볼 일은 아닌 듯 해서지요.

또 잠시 머물다 떠날 게 분명한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봄과의 상견례를 서두를 일이란 것도 짐짓 채근도 해보고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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