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마종기

내가 죽어서 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쓸쓸해집니다

산골짝 도랑물에 섞여 흘러내릴 때
그 작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누가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까요
냇물에 섞인 나는 물이 되었다고 해도
처음에는 깨끗하지 않겠지요


흐르면서 또 흐르면서,
생전에 지은 죄를 조금씩 씻어내고,
생전에 맺혀있던 여한도 씻어내고
외로웠던 저녁, 슬펐던 앙금들을
한 개씩 씻어내다보면,
결국에는 욕심 다 벗은 깨끗한 물이 될까요

정말로 깨끗한 물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내가 당신을 부르겠습니다
당신은 그 물 속에
당신을 비춰 보여 주세요
내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세요

나는 허황스러운 몸짓을 털어버리고 웃으면서
당신과 오래 같이 살고 싶었다고
고백하겠습니다
당신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내 온몸과 마음을 함께 가지게 될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송두리째 가진다는 뜻을 알 것 같습니까
부디 당신은 그 물을 떠서 손도 씻고 목도 축이세요
당신의 피곤했던 한 세월의 목마름도
조금은 가셔지겠지요

그러면 나는 당신의 몸 안에서 당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죽어서 물이 된 것이
전혀 쓸쓸한 일이 아닌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시인 마종기
- 1939년 일본 도쿄 출생
- 1960년 월간 <현대문학> 추천 완료
- 1960년 시집 <조용한 개선> 외 다수
- 2003년 동서문학상 외 다수

<물빛>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할까, 아니면 시인 마종기를 따라다녀 볼까, 잠시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마종기가 풀어내는 언어의 향기가 오래 묵힌 된장처럼 구수하다가도 지리산과 백운산을 만나 바다와 가까워질수록 맑아지는 섬진강처럼 깨끗하기도 해서 읽어가는 내내 즐겁기가 이만저만 하지 않은 까닭이지요.

그런데 마종기라는 한 인간이 살아온 삶 자체에 궁금증이 일기도 합니다. 줄곧 시를 쓰는 시인의 길을 걸었으나 한편으로 문과생이었던 고3 시절 갑자기 진로를 바꿔 의사로서의 삶을 살기도 했다가, 공군사관학교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시절엔 난데없이 공군 방첩대에 끌려가 수없는 고문을 당하기도 했던 게지요.

1965년 초여름 마종기가 속한 재경 문인들이 박정희 정권이 몰래 추진 중이던 한일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면서 종종 서명문인들의 이름이 실리는 보도가 나갔는데 마종기의 이름도 떡하니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게 고문의 이유입니다.

이 무도한 박정희 정권은 시인에게 군인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를 들어 감금하고 폭행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는데 이 같은 경험은 복무를 마친 마종기가 대한민국을 등지고 훌쩍, 이름도 생소한 미국 오하이오주로 둥지를 옮기기로 한 결정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나 순탄치 않았던 마종기의 삶과는 달리 그의 많은 시편이 뜻하지 않게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국을 떠난 이국에서의 삶, 또 죽음과 맞닿아 있는 의사로의 삶을 사는 중에도 그는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놓치지 않았는데 그게 결국 밝고 투명한 시 세계를 가질 수 있었던 힘이 된 것이지요. 다만 마종기의 가볍고 투명한 언어들은 살아있으니 아프다는 것을 지목하고 있기도 하니 결국 생은 가볍거나 무겁거나 살이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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