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숲
                             조용미
가끔 옥룡사터 동백숲 헤매는 꿈을 꾼다

손에 얹어 온 동백잎을 들여다 본다
나는 자주 나뭇잎이나 꽃잎 한 장에서
내 운명을 읽어내려는 버릇이 있는 사람,
옥룡사터에는 탑도 부도비도 깨어진 부처도 없다
다만 수천 그루 동백이
탑과 부도비를 대신해 백계산을 뒤덮고 있을 뿐
동백 보려면 옥룡사를 찾지 마라 도선을 불러내지도 마라
심장을 꺼내어 보면 된다
나는 동백잎에 이 말을 새겨두고 내려왔다

동백숲은 어둡고 붉고 소란하다
벌들 잉잉거린다
바람은 붉은 꽃잎 갈피마다 깊숙이 스며든다
심장 위에 누가 동백의 목을 부러뜨려 놓았다
동백숲의 한가운데는
죽음으로 뻥 뚫여 있다

동백나무 아래 조릿대들이 쓰러져 있다
동백 아닌 것들은 하얗게 말려가며
붉은 숲을 떠나고 있다. 


※시인 조용미
- 1962년 경북 고령군
- 1990년 <한길문학>에 시 ‘청어는 가시가 많아’ 발표
- 2005년 김달진 문학상 외 다수
- 2011년 시집<기억의 행성> 외 다수
- 2007년 산문집 <섬에서 보낸 백 년>


고운 임이여! 거기, 아직 동백이 피었던가요?
혹시 길목마다, 굽 이굽이 산골마다, 햇볕 들고 그림자에 숨어든 음지에서도 붉디붉은 동백꽃 생모가지째 뭉텅 떨어져 아직 모질고 모진 생을 이별하지 못한 채 가쁘게 숨을 허덕이고 있진 않던가요? 

올겨울 지나 올봄이 다 지나도록 아직 동백숲에 가보지 못했지 요. 어쩌면 이 봄 내내 마음이 붉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피멍 지고 쓸쓸하였던 까닭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름드리 천년의 깊은 어둠을 담고 저리 울창한 동백숲에 넋을 빼앗긴 채 헤매다가 붉은 동백에 사무쳐서 어디 길을 걸어 내려왔 는지도 모르게 잔뜩 흔흔해진 마음으로 산문을 나서곤 했지요.

그럴 때면 빠지지 않고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것처럼, 아니 바랑 을 메고 길 떠나는 길에 만난 주막집에 들어서는 것처럼 허름하게 주저앉은 운암사 초입 순두부집을 찾고는 했지요.

참새 방앗간이었던 까닭에 어떤 이는 “동백숲 붉은 꽃은 다 핑계 다”며 “뭉텅 떨어진 동백꽃을 두고 쓸쓸해진 마음 역시 결국 막걸리 추렴을 위한 것 아니냐”는 핀잔이 넉넉할 만큼 자주 찾던 곳이기도 했으니 올봄 나의 두문불출은 동백숲의 입장에선 퍽이나 서운했을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좀 핍진한 시절이어서 그랬을 겁니다.
무던해지기도 할 일일진 대 나이 오십을 살고도 어느 깊은 근원을 가졌길래 분노의 샘은 이 렇게 자꾸만 샘솟고 절망의 늪은 깊고도 깊은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까닭이지요.

하여 무심코 먼지 잔뜩 묻은 조용미의 시집 <일만 마리의 물고기 가 산을 날아오른다>를 꺼내 읽다 말고 하필이면 시 <붉은 숲>에 시 선이 꽂힌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 수 있겠습니다.
그것도 옥룡사 의 기억은 내 ‘심장을 꺼내어 보면 된다’고 했으니 이보다 아귀가 잘 맞는 인연이 또 어딨겠는지요.

아마도 시인은 동백꽃 붉음과 심장의 붉음을 통해 몸이 기억하 는 옥룡사의 내밀한 속살들을 이렇게 상기시키고 있지 않을까 생 각됩니다.
더구나 가뭄 끝에 봄비다운 봄비가 세상을, 이리 메마른 땅을 적시는 날이니 날도 이만하면 이보다 좋을 순 없는 일 아니 겠는지요. 

그러니 이제 몸을 일으켜 떠나도 되겠지요.
처마 밑에 빗줄기 가 득하고 처마 위에 빗소리 가득한 날이니 순두두에 막걸리 한 잔이 면 길 떠나기 역시 참 좋은 날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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