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와 저항의 흔적을 찾다

제42주년 5·18광주민중항쟁 기념 주간이다. 1980년 5월 18일을 전후, 광주와 전남 일원에서 신군부 세력 퇴진 및 민주주의 실현을 요구하며 전개한 광주민중항쟁. 아픈 역사의 기억과 함께 민주항쟁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며 42년 전, 광주의 오월을 걸어보자.                     

국립 5·18민주묘지

5·18 민주화 운동으로 운명을 달리하거나 또는 행방불명된 사람들, 기타 5·18 민주화 운동 희생 자로서 세상을 떠난 이들이 모셔져 있다. 중앙에 우뚝 선 추모탑이 눈에 들어온다. 높이 40m로 두 개의 대칭되는 사각기둥인 추모탑 상부의 중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감싸 쥔 손 모양 내부에 설치 된 조형물은 난형환조라고 해 부활을 상징한다. 

5·18자유공원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상무대 법정, 영창 등을 복원해둔 곳이다. 5·18 자유공원 내부에는 헌병 대 중대 내무반, 헌병대 식당, 헌병대 본부 사무실 등이 그대로 복원돼 있다. 지도상에서 보았을 때 는 공원 내에 군대 식당이 있다는 표시가 있는데 사실 이 곳은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고문 및 조사, 재판 등을 위해 사용된 곳이다. 

5·18 기념공원

5·18 기념공원은 상무대 이전부지 일부를 시민공원 부지로 조성해 5·18 민주화 운동을 기리기 위해 조성됐다. 20만 제곱미터가 넘는 넓은 부지에 대동광장, 광주학생운동기념탑과 같은 역사 체험공간. 잔디광장, 산책로와 5·18 기념문화관 등이 마련돼 5·18 정신계승을 다짐하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기록관

5·18 민주화 운동 기록관은 2011년 5·18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이후 여러 사람의 노력을 통해 2015년 5월 13일 개관했다. 지하 1층부터 지상 7층 높이로 지어진 기록관에서 상설 전시가 이루어지는 곳은 1, 2, 3층 그리고 6층. 특히 1층 상설 전시실에서는 항쟁이라는 이름으로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의 모습을 자세히 다룬다. 

전일빌딩 245

전남도청사 앞에 위치한 이 빌딩은 옛 전남일보사와 광주일보 사옥이 있던 빌딩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는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들이 계엄군을 피해 몸을 숨긴 장소다. 1968년 준공 된 전일빌딩은 4년여간의 리모델링 후 ‘전일빌딩 245’라는 이름의 복합문화시설로 새롭게 개관했다. 전일빌딩 9~10층에 위치한 5·18 기념공간에는 총탄 흔적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는데 건물 기둥과 바닥에 무수히 많은 총탄 흔적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전남대학교 정문

1980년 5월 당시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는 용봉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놓여 있어 학생들의 도심 진출을 저지하는 경찰의 통제선이 이 다리 부근에 설치됐다.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이 확대되면서 전남대학교에는 전북 익산 제7공 수여단 제33대대가 배치됐다. 공수여단은 학내를 수색해 학생 수십 명을 폭행․구금했고 무장 대원 들로 출입문의 경계를 세웠다. 학생들은 전남대 학교 정문 앞에서 발생한 계엄군의 폭행과 실상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도심으로 진출했다. 항쟁의 도화선이다. 

옛 전남도청

도청진압작전명 ‘상무충정작전’을 수립한 계엄군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도청 회의실 지하에 보관된 폭발물. 계엄군은 24일 폭발 전문가인 군무원을 투입, 폭발물의 뇌관을 제거했다. 진압작 전에는 47개 대대 2만317명이 동원됐다. 새벽 3시 30분에 시작된 진압작전은 5시 20분경 사실상 종료됐다. 계엄당국은 17명이 사망했고, 227명을 연행했다고 발표했다. 현재 옛 전남도청 건물은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 16호)으로 지정돼 있다.

5·18민주광장

옛 전남도청 앞에 있는 광장이다. 5월을 상징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5월 16일 학생들이 주도 한 성회가 열렸다. 학생과 시민들은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5ㆍ18 민주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를 다시 개 최하려 했으나 계엄군과 경찰은 5ㆍ18민주광장에 최후의 방어선을 설치하고 시위대의 진출을 방어했다. 시위대가 5ㆍ18민주광장에 다다르자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시작됐다. 

광주역

광주역 일대는 시위대의 중요한 이동로였다. 이는 전남대 학생들이 5월 14∼16일 도심으로 행 진하고 귀교할 때 광주역 광장을 경유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5월 18일 전남대 정문에서 사건이 발생한 이에도 학생들은 광주역 광장을 경유해 금남로로 가서 시민들에게 비극을 전했다. 광주역은 외부와 연결된 주요 관문이라는 점에 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광주역은 계엄군의 만행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될 수 있는 출구였고 반대로 계엄군이 광주로 들어오는 입구들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대학교

항쟁 당시 계엄군의 주요 주둔지다.  조선대에 주둔한 계엄군은 5월 18일 밤부터 대거 증가했다. 서울 동국대에 배치됐던 제11공수여단 병력이 항공편 등으로 광주에 증파된 것이다. 제11공 수여단의 주력은 조선대에 배치됐다. 조선대에는 제7공수여단과 제11공수여단 등 1,000여명 이상의 계엄군으로 북적였다. 광주 시내의 병원들이 갑작스럽게 밀려든 환자들로 혼잡스러웠던 것과 대조적으로 조선대학교 병원이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것은 바로 계엄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 이다.

양동시장

양동(良洞)시장은 1973년에 개설된 상설시장이다. 양동시장은 시민군에게 음식물과 생필품 등을 제공하는 대표적인 장소였다. 시장의 상인들은 십시일반 돈과 물품을 모았고 김밥, 주먹밥, 떡, 음료수, 약품 등을 왕래하거나 전남도청 등에서 항거하는 시민군에게 전달했다. 양동시장뿐만 아니라 대인시장, 남광주시장, 풍향동 백림약국 부근, 산수1동 봉사대, 지산동 봉사대, 전남방직 앞, 학운동 일대, 월산동 등에서도 이루어졌다.

남동성당

항쟁 당시 시민대표와 성직자들의 대책본부로 이용됐던 곳이다. 남동성당은 1949년 12월 광주시 두 번째로 창립된 천주교 교회로, 1980년 5 월 당시에는 김성용(프란치스코) 신부가 주임신부였다. 남동성당은 광주 도심에 위치해 5월 14∼ 16일 전남도청 앞 분수대와 금남로 일대에서 학생들이 개최한 민주성회와 거리행진 등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았다. 항쟁기간 남동성당에서는 지역 인사와 성직자들이 의견을 교환하는 모임이 자주 개최됐다. 

정리=최인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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