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영의 역사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광양여행 5
‘섬거장’은 1926년 개장...진상전통시장의 전신

 

‘진상전통시장’이 지난달 28일 재개장했다. 이를 위한 기념식은 5월 8일 행해졌다. 이에 광양시민신문은 우리지역 장시(場市)인 ‘5일장’의 역사에 대해 면면을 살펴본다.
 
조선시대 읍내장 등 장시 4곳 존재
우리지역 장시(場市)는 조선시대와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개장과 폐장을 반복해 왔다. 그러나 5일장인 장시(場市)가 언제 어떻게 개장과 폐장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됐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구전으로 알려진 게 전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장시에 대한 문헌이 별로 없어 그 역사성을 알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광양시민신문은 1795년 간행된 ‘광양읍지’와 1925년 발행된 ‘광양군지’ 그리고 100년 전후로 발행된 매일신보, 조선일보 등 각 매체를 망라해 ‘광양장시’에 대한 신문기사를 발굴해 공개한다.

 

우리나라 장시(場市)는 신라가 수도에 설치한 것을 최초로 보고 있다. 그만큼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후 조선개국과 함께 자취를 감춘 이후 1470년부터 다시 개장하게 됐다고 한다.

우리지역 5일장이 문헌으로 나타난 것은 1795년께 발간된 ‘광양읍지’가 현재로서는 유일하다. 전라남도 광양현이 간행한 당시 광양읍지는 우리지역 장시(場市)에 대해 △읍내장은 성 안에 있으며 1일과 6일에 열리고 △옥곡장은 동쪽 30리로 4일과 9일에 △섬거장은 현의 40리로 5일과 10일에 열리며 △사평장은 현 동쪽 60리로 3일과 8일에 각각 열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1795년 간행된 광양읍지...우리지역 4개 시장의 장소와 장이 열리는 날짜를 기록하고 있다.
1795년 간행된 광양읍지...우리지역 4개 시장의 장소와 장이 열리는 날짜를 기록하고 있다.

 

다음 문헌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1월12일에 발행된 ‘광양군지’를 들 수 있는데, 광양군지는 당시 광양장시에 대해 진상 ‘섬거장’ 이하는 모두 폐지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지역 근현대 시장은 동학과 연이어 두 번 일어난 민란 등으로 시장의 기능은 거의 상실됐다. 더욱이 1910년 국권이 피탈되며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과다한 세금(장세)부여와 시장 억압과 수탈에 자연적으로 폐장과 재개장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우리지역 장시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다.

섬거장 개시
1926년 1월 21일자 조선일보

조선일보는 1926년 1월 21일자 지면을 통해 ‘섬거시장’의 개장 소식을 알렸다. 제목은 ‘섬거초시성황(蟾居初市盛况)’. ‘당일 매매 만 여원’.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섬거장 개장’을 알린 1926년 1월 16일자 기사
‘섬거장 개장’을 알린 1926년 1월 16일자 기사

 

‘섬거시장’은 광양동부의 중앙으로 중요 산물이 다수 생산되는 등으로 인해 수 십 년간 ‘섬거시장’ 설치를 요청했었다. 이때 지방 유지의 발기로 번영회를 조직해 전남도에 시장설치를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 비로소 1925년 12월 19일에 허가가 났다. 이후 1개월 후인 1926년 1월 16일 개장식을 성대하게 열었는데 당일 참석 인원은 5천명에 이르고 축하행사는 신구극과 제등행렬로 성황을 이루었으며 당일 매매된 금액은 1만 여원에 달했다.

섬거장이 1926년에 개장했다는 조선일보 기사
섬거장이 1926년에 개장했다는 조선일보 기사

 

매일신보도 기사화 했는데 좀 더 구체적이다. ‘전남 광양군 진상면 섬거리는 광양동부의 중앙에 자리함에도 교통이 불편했었는데, 최근 망덕간 등외 도로가 개통되어 사통오달한 중요 지점이 됐다. 아울러 섬거시장 시장허가를 득하여 개시 중이었다. 이는 불황으로 부진함을 유감으로 여겼는데 주민들이 번영회를 조직하여 회장 김현주 씨 등 주민들이 열심히 노력한 결과이다. 

‘진상장’이 5일장으로 3, 8일 개장했다는 1932년 7월 25일자 매일신보 기사
‘진상장’이 5일장으로 3, 8일 개장했다는 1932년 7월 25일자 매일신보 기사

 

불미스러운 기사도 눈에 띈다. 1926년 1월 27일 기사는 번영회가 주최한 섬거시장 개장 축하행사에 5백여 명이 운집해 성황을 이뤘는데, 장년부 경기 후 시상식 때 불공정한 사례로 인해 진상경찰주재소 순사와 충돌이 일어난 것을 다루고 있다. 당시 해당 순사는 악습에 항의하는 주민을 검속하고 죽봉으로 난타한 일로 진상경찰주재소에 대한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는 요지다.

1932년에 최초 개장한 진상5일장
진상장은 1932년에 개장을 하면서 3일과 8일에 열리는 5일장으로 개장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전신인 ‘섬거장’은 장날이 5일과 10일에 열렸는데 날짜를 변경한 것이 눈에 띈다.

이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사평장이 폐장돼 사라지자 진상장을 개장하면서 하동장 다음 날이자, 옥곡장 전날인 3일과 8일에 날짜를 변경해 지금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다압면 ‘신원시장 개장’ 
다압면 신원에 ‘신원시장’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매일신보는 소화 3년인 1928년 6월 28일자 지면을 통해 ‘광양신원시장 개시식 성황’을 알렸다. 6월 8일 오전 11시부터 행사를 가졌는 데 광양군수를 대신해 박서무 주임과 안등 서장, 각 면장 등 유지 다수가 참석해 개장식을 열었다. 이날 행사는 김용수 다압면장의 개회사에 이어 번영회장의 경과보고, 축사 순으로 진행됐다.

다압면 ‘신원시장’ 개장을 알리는 매일신보
다압면 ‘신원시장’ 개장을 알리는 매일신보

 

이후 연회를 마친 다음, 시장 각 점포를 시찰했는데 당일 시장상인은 섬진강을 반으로 나열할 정도로 전에 없었던 성황을 이루었다. 이날 매매 총액은 3천여원에 달하고 장을 오간 사람은 무려 5천여 명으로 경기가 부진함에도 불구하고 성황이 극에 달했다.

광양시장이전(光陽市塲移轉) 1937.06.10석간 7면기사 (경제)【광양(光陽)】종래(從來) 광양시장(光陽市塲)은 협착하야 일반(一般)은 매우 불편(不便)을 늣기든바 광양읍(光陽邑)에서는 기전광양공보교기지(其前光陽公普校基地)에다상당(相當)한 비용(費用)을 드려 신시장(新市塲)을 설비(設備)해노코 지난오월삼십일(五月三十日)부터 개시(開市)하엿다한다.
광양시장이전(光陽市塲移轉) 1937.06.10석간 7면기사 (경제)【광양(光陽)】종래(從來) 광양시장(光陽市塲)은 협착하야 일반(一般)은 매우 불편(不便)을 늣기든바 광양읍(光陽邑)에서는 기전광양공보교기지(其前光陽公普校基地)에다상당(相當)한 비용(費用)을 드려 신시장(新市塲)을 설비(設備)해노코 지난오월삼십일(五月三十日)부터 개시(開市)하엿다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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