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陽에 살았던 史람들이 만든 이야기-21

16세기 말 7년에 걸친 일본의 조선 침략 전쟁은 크게 임진왜란(1592년)과 정유재란(1597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구의 1차 침략 목표는 한양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의 북상 경로에서 전라도는 비켜 있었고, 광양은 임진왜란의 직접적인 피해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광양 현감과 백성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이 시기 광양 현감 어영담 휘하의 관군은 수군에, 의병은 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였다.

▲ 쌍의사
광양현감 어영담, 중부장으로 활약

전라좌수영에 임진왜란의 소식이 전해진 것은 발발 3일째인 4월 15일, 거제도에 있던 경상우수사 원균의 연락에 의해서였다. 이순신은 바로 관내 장령회의를 열고 경상도로의 출전 여부를 의논케 하였다. 대부분의 휘하 장수들은 담당 구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영남 해역에 진군하기를 반대하였다.

이때 광양현감 어영담을 비롯한 녹도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이 이순신에게 진격할 것을 권하면서, “적을 토벌하는 데 내 도와 남의 도가 따로 없으니, 먼저 적의 선봉만 꺾어 놓으면 본도도 역시 보전할 수 있다.”고 하였다.

▲ 김천록 정려비
이순신이 깊이 고민한 끝에 “광양현감 어영담의 말이 옳지만, 단지 물길이 깊고 먼 데를 잘 아는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걱정이다.”라고 하자, 어영담이 스스로 선봉이 될 것을 자처하여 영남 해역의 수로향도가 되었다고 한다.

어영담은 무예가 출중하여 무과에 급제하기도 전에 벌써 특별채용으로 전라좌수사 소속인 여도만호가 되었다. 33살에 무과에 급제한 이후에도 전라도 ․ 경상도 해상 각 진(鎭)의 장령을 역임하여 남해안의 해상 지리에 밝은 ‘물길 전문가’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해인 선조 24년(1591) 윤삼월 광양 현감에 임명되었다.

어영담은 이순신 장군이 이끌던 전라좌수영에서 중부장으로 활약하였다. 어영담이 참여한 최초의 해전은 임진년 5월 7일의 옥포 해전이었다.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총 26척의 일본 전선을 격파하였는데, 이중 어양담 현감 휘하의 광양 수군이 4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사천 해전, 한산도 해전 등 십여 차례의 해전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특히 한산도 대첩에서는 ‘먼저 돌진하여 왜의 층각대선(層閣大船) 1척을 깨뜨려 바다 가운데에서 온전히 사로잡고 왜장을 쏘아 맞혀서’ 참수하기도 하였다. 안타깝게도 어영담은 갑오년(1594) 3월 4일 제2차 당항포 해전을 마지막으로 전염병에 걸려, 그해 4월 9일 진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어영담, 억울하게 파직을 당하다

이순신 장군이 1597년 모함을 받고 서울에 압송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정탁의 변호로 사형을 면하고 백의종군했던 것처럼, 광양현감 어영담도 1593년 11월 조정으로부터 광양 현감직에서 파직 명령을 받았다. 이것은 독운어사 임발영이 광양현을 순시하던 중 창고에 쌓인 600석의 양곡을 보고, 이는 필시 현감이 부정하게 축첩한 것으로 예상하고 조정에 보고하였기 때문이다.

광양 백성들은 어영담 현감의 양곡 비축 사건이 잘못되었음을 126명의 연명으로 작성하여 이순신에게 등장(登狀)을 올렸다. 그 등장의 호소에는 “까닭도 없이 죄에 연루되어 현감이 파직당하는 것을 백성은 부모를 잃은 것처럼 생각한다. 창고에 쌓아둔 양곡은 종자 곡식과 백성 구급용으로 별도로 보관된 것이다.”고 호소하였다. 광양 백성의 적극적인 구명을 지켜본 이순신은 조정에 장계를 두 번이나 올렸다.

그 두 번째 장계에서 이순신은 어영담을 조방장으로 임명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 장계에서 이순신은 “누구보다 물길의 형세를 잘 알아 중부장으로 임명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다.”고 하였다. 해전은 어떤 사람이나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어영담의 해전 능력이 꼭 필요함을 역설하였고, 한편으로는 백성의 소원을 들어주시기를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어영담의 선정을 참작하여 조방장으로 임명을 허락하였다. 어영담은 임진왜란 때 세운 공을 인정받아 선조 38년(1605)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 함종어씨지묘 바위
▲ 함종어씨지묘 바위(부분확대)
현재 광양시 옥곡면 신금리 금촌마을에는 동굿으로 가는 모퉁이에 <함종어씨지묘(咸從魚氏之墓)>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현재는 (주)지엔텍코의 축대로 이용되고 있음-가 있다. 전하는 바로는 조선초기 함종어씨 부원군이 이곳에 유배되어 일가를 이룬 이후 문중의 묘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다른 지역으로 이장되었다. 이 함종어씨를 어영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는 입장도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한편,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당시 여주 판관이었던 골약동 금곡마을 출신의 김천록은 군량을 수송하는 큰 공을 세웠으며,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김천록은 어영담과 함께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1891년에는 조정에서 정려(旌閭)를 내렸는데, 현재 유당공원에 김천록 정려비와 이건사적비가 있다.

광양의 형제 의병장, 강희보ㆍ희열과 김사례, 대례

임진왜란 때 광양 의병들은 1593년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9일 동안의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였다. 진주성은 왜구들의 호남진출을 위한 관문에 해당하여 조 ․ 일 쌍방 간에 총력을 기울여 전투를 치른 곳이었다. 광양 봉강면 신촌마을 출신 강희보 ․ 희열 형제가 진주성 전투에 적극 참전한 것은 진주성의 수호가 곧 광양 수호라는 의미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 강희보 희열의 묘
흔히 형제 모두 의병장으로 알고 있으나, 형 희보가 순수 의병장인 데 비해, 동생 희열은 무과에 합격한 관군의 신분으로 구례의 석주관을 지키던 도중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였다. 형제는 진주성 전투에서 모두 전사하였으며. 이후 진주성 창렬사에 배향되었다. 영조 40년 강희보에게는 호조좌랑(정6품), 강희열에게는 병조참의(정3품)가 추증되었다. 형제의 무덤과 사당은 봉강면 신룡리에 있다.

한편, 1592년 8월 이순신은 좌수영 근처의 고을에 공문을 띄워 사찰의 승병과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에 송천사의 승려였던 성휘를 비롯한 승병 4백여 명이 모였다. 이때 성휘는 우돌격장을 맡아 강희열과 함께 두치진 방어를 맡았다.

▲ 김대례 비
김사례 ․ 대례 형제는 진월면 송현마을 출신이다. 무과에 급제한 동생 김대례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 묘도 전투에서 순국하였다. 김대례의 친형인 김사례도 이순신 휘하에서 많은 공을 세웠으며, 형제는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현재 진월면 송금리 송현마을에 충신 김대례 공신각이 있다. 묘하게도 광양의 형제 의병장은 형보다 동생들이 더 유명하였다. 동생들은 무과에 급제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광양은 임진왜란 때 전투의 현장은 아니었지만,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적극 참여하였다. 광양 현감 어영담은 이순신 휘하의 수군으로 맹활약하였고, 광양의 의병들은 진주성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역사 속으로>

섬진진과 선소

다압면의 섬진마을과 진월면의 선소마을은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이다.
임진왜란과 그 이후 섬진마을과 선소마을의 변화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조선전기까지 나루터(津)였던 섬진마을은 임란 이후 군사적 요충지(鎭)로서의 역할이 추가되었다.
선조 36년(1603) 조정에서는 섬진에 임시로 도청창(都廳倉)이란 창고를 설치하고 민간인 자원병으로 구성된 모군(募軍)을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그 규모가 커지자 숙종 31년(1705) 마침내 진으로 승격시켰다.

즉, 나루터의 기능에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기능이 추가되면서 섬진에서 섬진진(蟾津鎭)으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섬진진은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 때 폐쇄되었다. 당시 각 군문을 통폐합하여 군무아문(軍務衙門)의 소속으로 일원화하면서 삼도수군통제영이 폐영되었고, 그에 따라 섬진진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것이다.

현재 다압면 도사리 섬진마을에는 옛 섬진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서해관, 옥터, 군량터, 무기창고, 장정터, 선화당터 등의 옛 이름이 남아 있는데, 고지도에 나타난 아사(衙舍), 내아(內衙), 진창(鎭倉), 군기(軍器), 장청(將廳), 성황당(城隍堂) 등의 위치와 일치하고 있다. 섬진진의 책임자였던 별장들의 공적비는 사라지고, 공적비의 두꺼비 좌대 4기만이 이제는 매화마을로 더 유명해진 옛 섬진진을 지키고 있다.

한편, 진월면 선소리 선소마을에는 배를 만들던 관청인 선소(船所)가 있었다. 마을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선소마을은 해안선이 내륙 쪽으로 깊숙하게 만입되어 있으며, 주변에 산들이 많아 배를 만들기 위한 목재를 구하기 쉬우며, 섬진강을 끼고 있어 내륙 쪽으로 연결되는 교통로 역할을 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등 선소로써 지녀야 할 입지를 충분하게 갖추고 있다.

이순신의 쓴 『임진장초』에 1593년 12월 진월면 선소에서 4척의 배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진월면 선소는 순천, 흥양, 보성, 낙안 선소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 조선소였음에 틀림없으나, 현재는 주변 지형의 변경이 심하여 정확한 위치 확인은 불가능하다.

조선시대 광양은 변방 중의 변방으로 별로 주목받지 못한 곳이었다.
하지만 다압면의 섬진진과 진월면의 선소를 통해 역사 속에서 묵묵히 자기 역할을 다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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