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문화 산책-민점기 시인

도선은 48세 때인 875, 아버지 왕륭에게 고려 태조인 왕건의 출생을 예언하고 집의 방향을 고쳐주었다. 이후 50대 중반인 880년경엔 신라 헌강왕의 초대로 경주에 갔으나 왕궁에 잠깐 머물다 옥룡사로 돌아온다. 옛 나라가 흔들리고 새 운명은 감감할 때 미리 새로운 천 년을 준비한 선각국사 도선의 면모를 알게 해 준 일화다. 이처럼 끝나기 전에 끝날 줄 알았고 오기 전에 올 것을 알았던 선지식인 도선은 많은 일화와 재미난 이야기를 몰고 다닌다.

그중에는 탄생 설화와 어머니를 모신 인간미 넘치는 이야기도 있다.

영암 도갑사 소장 도선국사 진영
영암 도갑사 소장 도선국사 진영

처녀가 오이를 먹고 아기를 가졌다?

도선국사 탄생과 관련한 이야기론 모친 강씨의 꿈에 어떤 사람이 광채 나는 구슬 한 개를 주면서 삼키라 하였는데, 삼킨 후 태기가 있었다. 만삭이 되도록 매운 것 비린내 나는 것들을 가까이하지 않고 오직 독경과 염불에만 뜻을 두었다는 내용이 광양 옥룡사에 세워진 국사의 비문에 나온다.

반면에 출생지인 영암 도갑사에 세워진 도선-수미대사 비문에는 최씨 처녀가 냇가에서 빨래하고 있는데 큼지막한 오이가 떠내려 와서 먹고 잉태하였다라고 나오며, 조선시대 지리역사 책인 신동국여지승람 영암의 옛 이야기 모음 편에는 최씨 처녀가 정원에 열린 한 자(30센티미터) 되는 오이를 따 먹고 잉태하였다. 이후 최씨 처녀가 아기를 낳자 이웃이 부끄러워 처녀의 부모가 대나무밭에 내다 버렸는데 비둘기와 독수리가 와서 돌보았다. 이를 신기하게 여겨 데려와서 소중히 키웠다고 나온다.

출생지인 영암에서 전해져 오고 있는 탄생 설화가 옥룡사 비문에 나오는 이야기보다 훨씬 재미있고 인간적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생명력이 길고 강하다. 필자도 문화홍보실에 근무할 때 향토문화답사방학 숙제를 하러 찾아온 초등학교 3~4학년 학생들에게 영암의 탄생 설화를 아래와 같이 꾸며서 들려주곤 했는데 무척 좋아했다.

영암 도갑사 아래 구림마을에 사는 최씨 처녀가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팔뚝만 한 오이가 둥둥 떠내려왔다. 오이가 빨래하고 있는 물웅덩이에 와서는 동동 맴돌며 귀찮게 해서 방망이로 툭 밀었다. 그런데 저만큼 떠내려가다 다시 휙 돌아와서 빨래하는 곳에서 또 맴돌았다. 다시 방망이로 툭 밀고 다시 돌아오고 이러기를 세 번 하다가 처녀가 그만 오이를 먹어버렸고 아기를 잉태했다

경전 공부에서 참선으로 그리고 전국유람

도선의 인생역정은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더욱 극적이고 이야깃거리가 많다. 15세에 화엄사에서 머리를 깎고 당시 불경의 중심 책자인 화엄경을 공부했는데 1년 만에 모두 깨달았고 20세에는 대장부가 어찌 문자에만 매달려 공부할 것이냐며 경전 중심 공부에서 벗어나 당시 새로운 공부 방법인 선 수행에 들어가고자 한다. 마침 통일신라 말 9산선문의 하나인 곡성의 동리산에서(지금의 태안사)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혜철대사가 선문을 열자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참선 공부 3년 만에 도선은 23세에 전국 유람에 나선다. 국사의 옥룡사 비문에 의하면 대사가 이미 깊은 이치를 통달하고는 거처하는 곳이 일정치 않았다. 안개와 노을을 밟고 바위굴에 앉아 그윽함을 찾고, 명승지를 찾아 열심히 공부했다. 혹은 운봉산 밑에서 도굴을 파고 참선도 하고, 혹은 태백산 바위 앞에서 띠 집을 짓고 여름을 나기도 했다라고 나온다.

영암 도갑사 도선-수미선사 비
영암 도갑사 도선-수미선사 비

사성암 상백운암 거쳐 평생 머문 옥룡사로

백두산에서 땅끝까지,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행을 마친 도선은 구례 오산에 사성암과 백운산 상백운암을 거쳐 37세인 864년 드디어 옥룡사에 들어오는데 국사의 비문에 이렇게 기록되었다. “희양현(광양군) 백계산에 옥룡사라는 옛 절이 있었다. 대사가 돌아다니다가 여기에 와서 그 그윽한 경치를 좋아해 집을 고치고, 깨끗하게 평생을 마칠 뜻으로 혼자 앉아 있으면서 말을 잊은 지가 35년이나 되었다

국사가 옥룡사에 머물자 전국에서 학도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말 없는 말 법 없는 법으로, 수백 명의 제자를 가르치자 눈만이 부딪히고 마음으로 전하여 제자들은 텅 빈 그릇으로 왔다가 꽉 채워서 돌아왔다고 비문에 전한다스승인 혜철선사의 동리산파에서 이젠 광양 옥룡사파를 독자적으로 형성한 것이다.

한편 한꺼번에 수백 명의 제자가 모이자 비좁은 옥룡사에선 감당이 되지 않자 옥룡사에 들어온 이듬해인 865, 가까운 곳에 운암사를 지어서 제자들을 머물게 한다. 당시의 운암서 터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 등 유물이 발견되진 않아서 확정 짓지는 못하지만, 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을 지낸 성춘경씨와 순천대박물관 등 관련 연구자들에 의하면 지금 운암사가 있는 운암골과 옥룡사 북쪽에 해당하는 새운암골 또는 도선국사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삼층석탑과 쌍사자석등이 있는 중흥사 중에 옛 운암사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버티는 백룡 눈 찌르자 물러나다

옥룡사를 고쳐서 살게 되었다는 문헌과는 달리 도선국사가 옥룡사를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재미나게 전한다. “옥룡사 터 앞쪽 연못에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 국사가 용들에게 그 연못을 메워서 절터로 만들려고 하니 비켜달라고 부탁했다. 여덟 마리 용들은 그러마고 자리를 옮겼는데 유독 백룡이 버티고 있어서 국사가 들고 있던 지팡이로 백룡의 눈을 찔러 멀게 하자 할 수 없이 물러났다는 이야기다.

또 연못을 메워서 말리기 위해 숯과 소금이 필요했는데 마침 눈병이 유행했다. 국사가 숯과 소금을 연못에 넣으면 눈병이 낫는다는 소문을 내도록 했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숯과 소금을 지고 와서 연못에 넣자 눈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재미나면서도 과학적인 내용이 들어있다.

실제로 1997~1999년 옥룡사지 발굴 때 필자는 문화예술팀장이었는데 현재옥룡사지 샘이 있는 언덕 바로 아래 연못 터에서 숯과 기왓조각들이 나왔다. 현재 샘 왼쪽에 있는 작은 연못은 약 60년 전에 만들어진 연못이다.

귀한 그릇과 용 문양 기와 사용한 국가사찰 옥룡사

연못 바로 위에는 살림집이 있었는데 올라가자면 오른쪽 동백림 아래에 작은 토굴이 있다. 곡물 저장창고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데 바로 그 앞쪽에는 옥룡사 그릇 창고가 있었다. 정유재란 때와 1878년에 불에 탔는데 발굴과정에서 불에 탄 채 쏟아져 내린 그릇 조각들을 무더기로 발굴했다. 조선시대에 사용한 분청사기와 백자가 대부분이었고 청자그릇도 여러 점 나왔다.

옥룡사지 그릇창고터 깨진 자기류 복원
옥룡사지 그릇창고터 깨진 자기류 복원

강진 청자를 비롯해서 서남해안 일대에서 광양포구를 통해 옥룡사로 양질의 그릇들이 실려 온 것이다. 지붕에 올린 기와도 민가에선 함부로 쓸 수 없는 용 문양이 새겨진 기와를 썼다. 국가사찰인 옥룡사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세 차례 발굴을 통해 국가사적지가 된 옥룡사지는 지금은 시에서 사들여서 나라 땅이 되었다. 하지만 옥룡사는 1878년 불이 난 후 폐사지가 되었는데 이후 청주 한씨 문중에서 땅이 되었다. 대웅전 자리에는 청주한씨 재실이 들어섰고(1923년 건립, 재실 상량문 확인) 그 앞쪽엔 문중 산을 지키는 관리인 집이 자리했고 여기저기에 민가도 들어섰다.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자 아래 유적들이 상당부분 훼손되었고. 건축에 사용된 돌이나 축대 도랑 구축물들이 옛 옥룡사 때 모습이랑 얼키설키 서로 얽혀 있어서 발굴 때 애를 먹었다.

옥룡사지 그릇창고터 자기류 출토상황
옥룡사지 그릇창고터 자기류 출토상황

어머니 암자 길을 명품 산책길로

부처 위에 부처 어머니! 스님들도 어머니 사랑은 각별해서 스님들이 나이 많아져서 오갈 곳 없는 어머니를 모신 사례가 꽤 있다. 진묵대사가 완주 왜막실에서, 경허선사는 안양 청계사에서, 근래에 원경 스님은 평택 만기사에서, 혜국스님은 충주 석종사에서 각각 어머니를 모셨다. 이런 사례에 비추어 볼 때 도선국사가 주지로 35년간 지낸 옥룡사에서 약1900미터 떨어진 곳에 암자를 지어 어머니를 모셨을 가능성은 상당하다.

옥룡사지에서 백계산으로 오르려는 첫 들머리에 백계산 선각국사 참선 들레길이라는 작은 안내판이 있다. 세우암자터라고 적힌 곳이 어머니 암자터인데 가는 길에 안내표지가 불친절해서 찾아가기가 어렵다. 백계산으로 900미터쯤 오르면 삼거리가 나타난다. 표지판이 서 있지만 어머니 암자터 표지판은 없다. 오른쪽으로 약간 내리막길을 따라 100미터쯤 가다보면 넓은 길이 오솔길로 변한다. 그리고 1300미터 지점에서 포장도로가 나오는데 길을 건너 나무다리로 계곡을 건넌다. 거기서 조금 더 가다보면 비로소 세우암자터 표지판이 딱 한 번 나온다. 물론 백계산 등산로 표지판은 자주 나온다.

도선국사 어머니 암자터 맷돌
도선국사 어머니 암자터 맷돌

드디어 어머니 암자 터에 도착한다. 암자가 있었던 위쪽 터에는 집 넓이만큼 양쪽으로 돌무더기가 쌓여있다. 암자 터 앞쪽 가운데에는 비석은 없어지고 비석대가 남아있다. 축대 위에는 기왓조각이 수북이 쌓여있다. 아래 터로 내려서는 길 들머리에는 맷돌 아래짝이 남아있고 터 앞쪽에 세우암자는 도선국사가 어머니를 모신 암자이다라고 시작하는 작은 안내판이 서있다.

어머니 암자터를 안내하는 표지판은 불친절하지만 산책길은 만점이다. 세 개의 물도랑을 건너면서 촉촉하고 그윽한 산의 깊이와 싱그러운 숲을 만끽할 수 있다. 표지판을 잘 세우고 중간 중간에 어지러운 임도 작업 길을 잘 정비해 주면 명품 참선길이 될 것이다.

도선국사 어머니 암자터 비석대
도선국사 어머니 암자터 비석대

필자는 26년 전 문화예술팀장으로 있을 때 마을 주민들과 스님들로부터 도선국사가 백계산 7부 능선에 암자를 지어 어머니를 모셨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1988년에 발행된 광양군 마을유래지에서 어머니 암자 터에 놓인 맷돌 사진(세운암골 맷돌)도 보았다. 그리고 가끔씩 어머니 암자 산책에 나섰다. 아래 시는 그때 쓴 시다.

도선국사 효행기
민점기

햇살 포실한 겨울날
도선국사, 장삼 소매에 홍시 두 알 받쳐 들고
광양 땅 운암골 백계산을 오른다
백두 묘향 태백 지리 무등 조계 백운
백두대간 호남정맥을 내리 지치던
날랜 걸음새 접어두고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고운 발길로
백계산 7부 능선 작은 암자를 오른다

금계포란 길지 옥룡사에 드신 이후 말을 잊어
말 없는 말’ ‘법 없는 법으로
수 백 제자를 길러 온 임
비로소 입을 열어 어머니하고 소리 한다
햇살 포실한 겨울날
장삼 소매에 홍시 두 알 받쳐 들고
도선국사,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백계산 7부 능선 어머니 암자를 오른다

필자는 발굴이 한창일 때는 물론이고 그 이전과 그 이후 또 지금도 옥룡사지에 자주 간다. 특히 머리가 아프거나 몸이 무거울 때 또 걱정거리가 있을 때 가서 동백 숲길을 걷거나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나온다.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편안해 진다. 추운 겨울에도 옥룡사지는 따습다. 눈이 와도 금방 녹고 쌓이지 않는다. 참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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