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오랜 시간을 달려온 차가 주차장에 이르자 쏴 하고 퍼붓는 듯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굽이진 길을 따라 흘러온 물이 바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의 소리는 맹수의 포효처럼 우렁찼다. 힘찬 물소리는 나에게 반가움을 전하는 소리처럼 다가왔고 푸른 잎이 넘실대는 나무들은 여전히 싱그러웠다.

물가에 다가가니 약간 비린 듯한 냄새가 풍겨왔다. 코를 흠흠 거리며 출처를 더듬어 보니 근처 나뭇잎과 흙냄새가 섞인 자연의 냄새였다.
도시 골목의 건조하고 매캐한 냄새에 가려져 한동안 잊고 지냈던 친숙한 냄새이기도 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내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집을 떠나 있던 여러 날 동안 줄곧 가슴을 짓누르는 체기와 같은 불편함에 시달렸는데 저들을 보니 막혔던 가슴이 단번에 뻥 뚫린 듯했다.

친구들과 떨어져 지낸 기간이 꽤 오래되었다.
도시에 살 때는 가끔씩 가족들과 어울리며 마음을 나누던 친구들이었는데 내가 산촌에서 살다 보니 살짝 거리감이 생기고 마음마저 멀어지는 것 같아서 몹시 아쉬워하곤 했다.

“야! 이러다 얼굴도 못 보고 죽는 것 아니냐?”
한 친구의 볼멘소리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문제는 나였다. 나만 움직이면 만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그래,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 인생인데….”
모처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고 나는 그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며칠 전부터 마음이 설렜다.

만나면 헤어져 있는 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나의 산촌 생활 얘기를 들려주자고 굳게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그들을 만나기 위해 도시를 찾아가고 약속 장소를 찾는 과정은 즐거움보다는 그에 따르는 불편이 더 컸다. 친구들은 만나 긴 회포를 풀었지만 그들의 얼굴에 드리운 약간의 피로감이나 쫓기는 듯한 도시 생활의 그림자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도시와 농촌에서 생활하는 방식의 차이가 작은 틈처럼 벌어져 있었다.

그들과 헤어지고 익히 알고 있었던 골목길을 걸었는데도 몹시 낯설고 어색했다. 내가 살았던 도시도 친숙한 사람들도 나도 세월 가듯 서로가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고 집사람을 설득하고 다그쳤던 것도 도시의 소음과 복잡함에 대해 지나칠 만큼 답답해하고 예민하게 반응했던 이유도 바로 산촌의 시냇물과 나무들 때문인 듯했다.

나는 40여 년을 줄곧 도시에서 살아왔지만, 오직 생존을 위해 도시에서 경쟁하듯 살아가는 내 삶이 못마땅했고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들에 못 견뎌 했다. 그럴수록 푸른 숲 우거진 곳에 살고 싶은 평소의 꿈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고질병처럼 깊어지곤 했다. 뭔가 내 인생의 패턴을 바꾸지 않으면 더 큰 후회가 돌아올 것이란 생각이 나를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수많은 망설임과 고민 끝에 나는 용감하게(실은 무모하게)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로 내려오게 되었다.

처음 산촌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는 더 이상 도시에 살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만으로 날아갈 듯했다. 도시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시작될 생활에 대한 기대감은 있었지만 잘 해낼 수 있을 것인지 두려운 마음도 컸다. 그런데 많은 사람과 부대끼며 사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내가 처음부터 산촌의 조용함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았다.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분위기는 내가 새로운 곳으로 찾아왔다기보다는 세상에서 멀리 밀려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있는 것이 산촌 본래의 모습인 듯해서 큰 장벽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하루 이틀 지나면서 일정한 소리로 흐르는 물소리를 비롯한 자연의 살아있는 모습은 불안정했던 나의 호흡을 자연스럽게 해 주었다.
눈앞이 온통 초록뿐인 세상, 계절마다 바뀌는 풍경, 생동하는 자연을 바라보며 점차 산촌의 분위기에 깊이 스며들었다.

산촌에 내려와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은 우선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사람들이 찾아와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었다.

계곡 옆에 펜션과 카페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당시 풍경만으로도 충분했지만 계곡 주변으로 꽃나무를 심고 누구나 거닐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평지에는 단풍과 금목서, 남천, 동백 등을 집 주변 곳곳에 심었고 산에는 매화와 편백, 수국 종류, 조팝나무를 집중적으로 심었다.

그때는 나에게 나무라도 심을 수 있는 땅이 생겼다는 사실에 몹시 들떠 있었다. 생각보다 넓은 땅은 내게 나무와 꽃을 향한 욕심을 키우게 했다.
어설픈 솜씨로 묘목을 심으면서 제대로 자랄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수시로 의욕이 넘쳐난 탓에 어두워질 때가 되어서야 일을 끝내곤 했다.

흙을 만지거나 나무를 심을 때는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내 안의 거친 것들이 순화되고 자연에 머리를 조아리게 되는 겸손한 태도로 바뀌어 있었다.

땀을 흘리며 일에 집중하다 보면 근심이나 걱정은 잊히고 내 안에 새로운 삶의 에너지가 자리를 잡곤 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변화들이 놀랍기도 했지만 예전과 다른 긍정적인 생각들이 산촌 생활에 활기를 불어왔다. 많은 나무를 심었던 것은 아마도 도시라는 헐벗은 벌판에서 방황했던 나의 과거를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런 기억들을 지어버리려고 더 열심히 심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냇가에서 바위를 옮겨와 돌담을 쌓고 실개천을 만들기도 했다.

집 뒤로 흘러내리는 시냇물을 끌어와 앞마당으로 흐르게 했고 넓은 잔디밭 한가운데에는 과거 농로로 쓰였던 수로를 열어서 하천의 물이 흐르도록 했다. 실개천의 물이 흐르면서 냇가에 살던 피라미들이 따라 들어와 붕어들과 함께 살기도 하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개구리들도 몰려와 알을 낳기도 했다.

주변을 거닐며 그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사는 모습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생겼고 조화로운 삶을 쓴 스캇 니어링 부부의 삶이 생각났다.

시골에서의 노동은 창조적인 삶으로 이끌어주며 도시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갈구하며 누리고 살았던 그들의 이야기가 나의 귀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처럼 철저하게 자연의 방식으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던 산촌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다행스럽고 감사했다.

매일 밤 잠자리에 누우면 과도한 노동 탓에 온몸이 욱신거렸다. 나 스스로 며칠은 쉬어야 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곤 했지만 해가 뜨면 어젯밤 일들은 까마득히 잊히고 다시 땀을 흘리는 일을 반복했다. 가끔 새벽에 잠이 깨면 당장이라도 일을 하고 싶었지만 좀처럼 가시지 않는 어둠에 갑갑증이 생기기도 했다. 팔의 통증은 노동의 인식표처럼 나를 따라다녔지만, 가끔 읍내 의원에 나가 찜질을 받으면 견딜 만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밀린 숙제를 하듯 한꺼번에 해치우듯 일에 몰두하곤 했다. 그런 식으로 노동이 끝나고 나면 반드시 새로운 작품이 생겨나곤 했다.

훌륭한 것이든 어설픈 것이든 내가 투자한 시간들이 내 눈에서 사라지지 않고 나만의 세상에 새로운 풍경이 되어주었고 더러 찾아오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도 했다. 그런 중독성 때문에 나의 노동은 오래 지속되었고 매일매일 즐겨하는 습관처럼 굳어졌다.

나무들을 심으면서도 과연 그들이 자랄 수 있는 햇빛과 습도를 자연에서 마련해 줄 수 있을지 강한 바람에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곤 했다. 그러나 나무들은 내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튼튼하게 자랐다.

커가는 자식을 바라보듯 내 곁에서 나무들이 계절 따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향기를 피워내는 모습을 바라보면 더없이 대견스럽고 흐뭇한 시간이 생겨나곤 했다. 
그때 심었던 나무들이 지금은 나의 손길에서 벗어나 하늘에서 그들만의 공간을 즐기고 있다.

나무들은 여름이면 계곡을 찾아오는 많은 사람에게 짙은 그늘을 주고 가을이면 빨갛게 물든 단풍을 선물한다. 그들은 나에겐 성장한 자식이며 자랑스러운 동반자이기도 하다.

그런 가까운 식구들을 두고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힘든 곳에 나가 며칠을 보낸다는 것은 고통에 가까운 일이 비록 처음엔 힘들게 가꾸었지만, 그 힘들었던 시간은 나의 건강과 보람을 선물해주었고 지금은 함께 어울려 사는 가족과 같은 관계로 발전해 있다.

지금도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가장 잘한 일은 산촌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나 주변에는 무엇이든 내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선택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런 권한이 내게 주어져 있음이 몹시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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