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문화 산책-민점기 시인

전국에 내놓으라 하는 사찰과 명당에 등장하는 인물 도선국사! 수천수만 곳에 터를 잡아 주느라 국사는 생전에 몹시 바빴을 것이다. 아마도 터 잡이 지도를 가져와서 물으면 도움말을 해 주었으려나? 국사의 유명세에 기대어 너도나도 온갖 터에 국사의 이름을 갖다 붙이기도 했겠지? 그런데 고려나 조선이 관련 기관을 두고 도선국사가 제창한 비보풍수를 정책으로 밀었다면? 국토이용계획을 세우고 집행했다면? 그리고 인간의 삶은 자연과의 상생이라는 비보풍수의 원리에 따라 생태환경 보존과 자연치유에 앞장섰다면? 이러한 물음표를 가지고 ‘자연치유와 국토사랑, 도선의 비보풍수’ 이야기를 시작한다.

도선국사 유골 발굴로 떠들썩하다
도선국사가 옥룡사에서 돌아가신 날은 898년 3월 10일이다. 도선국사 부도탑지 아래에 묻힌 석관 속에서 물에 잠긴 유골이 햇빛을 본 날은 그로부터 1099년 만인 1997년 3월 10일이다. 음력과 양력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돌아가신 날 유골을 발굴한 것이다. 문화예술 팀장이 된 지 두 달 만에 유골 발굴은 무척 당황스런 사건이었다. 먼저 스님들은 화장하는데 웬 유골?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곧 해소되었다. 화장이 보편화된 것은 조선 중기이고 그 이전에는 일단 석굴 등지에 시신을 모셨다가 2~3년 후에 뼈만 옮겨서 매장하는 2차장이 일반적이었다. 

약 1100년이나 된 유골이 골반과 머리 부분이 뭉그러진 것 말고는 팔, 다리, 정강이, 등뼈가 이렇게 선명하게 남아있다니? 하는 두 번째 의문도 해소되었다. 유골이 묘탑인 부도 탑 아래 묻힌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큰 홍수로 인해 물이 석관 속으로 넘쳐 들었다. 물 빠짐 구멍이 없는 석관이라서 유골이 물에 잠겼다. 공기와 접촉이 차단된 물속이라서 천 년이 넘어 보존되었다. 이러한 연구진의 의견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번째로 이 유골이 도선국사 유골이라고 볼 수 있을까? 라는 질문도 해소되었다. 도선국사의 석관(길이95 너비54 높이30.5 센티미터)과 크기와 모양이 거의 같은 석관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었다. 도선국사 보다 42년 후인 940년에 돌아가신 원주 흥법사에 진공대사의 석관이다. 도선국사의 묘지인 부도 탑 아래의 석관 속에 들어있는 유골이니 국사의 유골로 보기로 했다.(탄소연대 측정 방법으로 유골 연대를 알아보려고 했으나 너무 오래되어 측정이 어려웠음)

아담한 터에서 유골 지키고 시를 얻다
그때 발굴 직후 현장에 나온 김옥현 시장은 유골 훼손을 걱정했다. 나는 동료 팀원 한 사람과 저녁을 먹고 등산용 텐트를 메고 발굴 현장으로 갔다. 윙 윙 드센 바람이 산을 울렸다. 비석거리가 가까운 내천마을 가게에서 소주 한잔을 걸치고 강풍 속에 텐트 칠 것을 걱정하며 비석거리에 들어섰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동백 잎사귀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명당의 요건인 장풍, 즉 바람을 품되 바람의 해를 입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부터 많은 사람이 찾아들었다. 불교와 고고학 연구자들, 여러 스님들, 풍수 연구가, 문화유적에 관심 있는 지역민들이 줄을 이었다. 

며칠 후 현장 설명회를 열고 순천대박물관으로 석관과 유골을 옮겼는데도(이후 부도 탑 복원 때 본래 자리에 안치) 방문객은 한동안 이어졌다. 어떤 젊은 풍수가는 도선국사의 기운을 받겠다고 석관이 들어있는 돌방인 석곽(길이130 너비70 높이80 센티미터) 안에 들어가 한나절 내내 누워있기도 했다.

찾아오는 사람 중에는 한국풍수의 원조인 도선국사 같은 분이 왜 이렇게 작고 아담한 터에 묻혔을까? 하는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했는데 며칠 후 도선의 비보풍수 원리에 대한 최병헌 서울대 교수의 글을 읽고서 답을 얻었다. 국사는 활달하고 완벽한 터만을 찾기보다는 작고 약한 터를 고치고 가꾸는 데 앞장선 분이었다. 나라의 도읍지와 광역도시의 터, 지방 중소도시의 터, 마을의 크고 작은 터들이 각각 용도에 따라 어떻게 자리 잡고 활용되어야 좋을지를 앞서 알려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국사의 유골을 지키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래의 시를 썼다. 
마침 광양항 컨테이너부두 개장이 넉 달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1997년 7월 17일 개장)

유골 옆에서- 민점기

도선국사 일어나소서
천 년의 잠 깨어나실 때 되었습니다
당신이 점지한 햇살 따사로운 땅 열리고 있습니다
명당의 기운은 산에서 시작하여 들판으로 강으로
바다로까지 뻗쳐 흐릅니다
무심한 세월이라 탓하지 마소서
아마 임은 천년의 세월 후에사
일어나실 줄 벌써 아셨으리다
한 번의 천 년이 가고 또 한 번의 천 년이
오리라는 것을 벌써 아셨으리다

도선국사 깨어나소서
안개 자욱한 물가에서 먼동 트이길 기다리는
어린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물길 열어주시고
당신의 육신 간수해 온 햇살바라기 땅에
새로운 지평을 환히 밝히소서
파아랗게 이끼 오른 석관 속에 선연히 남아있는
당신의 굵고 바른 척추처럼
새로운 바닷길 새로운 천 년을 열어가는
이 땅의 힘줄 굵은 민중들에게
굵고 바른 뼈 매듭 허리가 되어주소서

도선국사 통진대사 부도탑과 비석
도선국사 통진대사 부도탑과 비석

사도리에서 풍수지리 전수받다
옥룡사지 도선비문에 의하면 ‘국사가 구례 오산 사성암(원효 의상 도선 진각대사의 수도처로 유명)에 있을 때 하루는 도인이 찾아와 아무 날 강가로 나오면 세상을 구제하고 인간을 제도하는 한 가지 방도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날을 맞추어 찾아가니 모래를 쌓아 산천의 순역의 형세를 보여주었다. 국사는 이로부터 음양5행을 환하게 깨달았다. 그곳을 사람들이 사도촌(沙圖村)이라고 불렀다’ 라고 나온다.

국사가 도인으로부터 풍수지리를 전수 받은 사도리는 오산에서 바라볼 때 섬진강 건너 노고단 앞쪽에 위치한 500미터 정도 되는 산자락 아래 길게 펼쳐진 마을이다. 건너다 볼 때 마을 왼쪽 가장자리 상은사라는 작은 사찰 마당에 3층 석탑이 오산을 마주보고 서있다. 고려시대 석탑으로 광양에 용장사 3층석탑과 모양과 크기, 만들어진 시기가 비슷하다. 풍수지리를 전수해 준 도인은 알 수 없다. 혹은 지리산 도인이라고도 하고 혹은 국사의 스승인 혜철선사가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분이기에 풍수지리의 기본을 국사에게 가르쳐 주었을 거라는 말도 전한다. 

구례 오산 사성암 뒤편에 자리한 도선굴
구례 오산 사성암 뒤편에 자리한 도선굴

비보풍수는 아픈 땅에
침놓고 뜸뜨는 것이다

아래 글은 최원석 경상대 교수의 글(2015년 월간산 기고)과 인터넷 기고가인 천석의 글(2015년 네이버 블로그)을 참고하고 필자의 생각을 더함.
비보개념에 대해 ‘고려국사 도선전’이라는 고려 말의 문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만약 병이 들어 위급할 경우 혈맥을 찾아 침을 놓거나 뜸을 뜨듯이 산천의 결함을 찾아 절을 짓거나 불상이나 탑, 부도를 세워 약점을 보강하는 것을 비보(裨補)라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도선의 비보사탑설은 비보풍수로 발전하는데 고려 태조 왕건은 비보풍수를 국토운영의 원리로 삼아 정책적으로 시행했다. 신종(神宗) 원년(1197)에는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이라는 국책지리기관을 설치해 결함이 있는 곳에 성이나 제방을 쌓았다. 조선조에서도 광범위하게 비보가 이루어진다. 대상지별로는 산천비보, 왕도비보, 고을비보, 마을비보 등으로 나눌 수 있고 비보물의 형태로는 절과 탑 세우기, 나무 숲 조성, 인공 산 만들기, 연못 만들기, 장승세우기 비보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구례 사도리3층석탑(전라남도 유형문화제)
구례 사도리3층석탑(전라남도 유형문화제)

조선시대에 기술관으로 음양과를 두어 비보풍수 전문가를 관리로 뽑았다. 
의술이 사람의 병을 고치고 다스리는 분야라면 음양(풍수지리)은 땅에 대한 지식이자 기술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자연환경과 사람의 관계를 음양 즉 비보풍수로 조절하고 관리한 것이다. 한양의 경우 삼각산부터 백악에 이르는 지맥의 중요한 지점인 현 북악터널에 보토소(補土所)를 두고 총융청이라는 담당 관청에서 국가적으로 관리했다. 땅의 기운이 빠져 나가는 청계천 수구 부위에는 양쪽으로 인공 산을 조성함으로써 기를 보강하고자 했다. 또한 관악산의 화기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해태 조형물을 세우고 남대문 앞에 남지라는 연못을 파기도 했다.

광양에도 비보 숲이 있다, 도선국사가 마을의 안녕을 위해 심었다는 옥룡 산내마을(도선국사 테마마을) 숲과 조선시대 박세후 현감이 조성한 유당공원에서 인동리에 이르는 숲이다. 유당공원 연못 또한 비보풍수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부도(보물제57호)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부도(보물제57호)

도선 풍수는
땅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도선의 비보사상은 환경관리사상으로서 자연재해를 조절하는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기능도 했다. 자연과 인간이 서로 조화롭게 어울리는 원리에 기초한 문화생태학이자 환경사상으로써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앞으로 비보풍수의 현대적인 재해석을 통해 환경생태주의라는 시대적 사회정신과 연계하고, 인류와 자연이 공존하는 전망을 세워보는 것도 좋겠다.

서울대 교수였던 최창조 선생은 “도선 풍수의 본질은 땅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며, 그 방법론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고침의 추구이다”라고 정의한 바 있다. 한편 최병헌 전 서울대 역사학과 교수는 1975년도 발표 논문에서 “도선의 풍수지리설과 후대에 왜곡된 미신적인 풍수도참설은 구별돼야 한다.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국토환경에 대한 합리적인 인식에 바탕을 둔 인문지리학이다”고 역설한 바 있다. 필자는 도선국사 유골 발굴 며칠 후에 최병헌 교수의 논문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묘자리 잡는 미신풍수로 잘못 왜곡된 도선의 비보풍수를 자연친화적 생태풍수로 바로 알게 되었다.

구례 연곡사 동부도(보물제53호)
구례 연곡사 동부도(보물제53호)

마음 편하고 몸이 느끼면 명당이다
산 능선에 올라서면 가슴이 확 트이고 기운이 솟는다. 계곡 물가에 앉으면 차분해진다. 바람이 잘 통하고 햇볕 잘 드는 곳에 있으면 명랑해진다. 어둡고 습한 갑갑하게 막힌 곳에 있으면 우울해진다. 명당이 별것인가? 마음이 편하고 몸이 좋게 느끼면 거기가 곧 명당이다. 난 편안하게 쉬고 싶을 땐 옥룡사지 동백림을 찾는다. 우뚝한 기운을 얻고 싶을 땐 진상 불암산성을 찾아 억불봉을 마주한다. 저마다 아끼는 공간, 자주 찾을 수 있는 장소 한둘쯤 가지고 있으면 좋을 것이다. 명당이란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가꾸어서 명당이 될 수도 있다. 사람도 태어나면서부터 품성이 좋은 사람이 있겠지만 살아가면서 가꾸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듯이. 이런 생각으로 명당을 찾기보단 생활 속 공간을 마음 편하고 몸이 좋도록 꾸미면 좋겠다. 

구례 사성암 오산에서 바라본 사도리
구례 사성암 오산에서 바라본 사도리

글을 마치며 드리는 의견
옥룡사지 비석거리에 도선국사 통진대사 부도와 비석이 복원됐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화순 쌍봉사의 철감선사 부도와 구례 연곡사의 동부도가 있다.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는 나무를 깎아 놓은 듯 정교하고 섬세하다. 연곡사 동부도는 훤칠하고 날렵한 몸매를 가졌다. 

그 두 부도 중에 어느 하나 아니면 중간 쯤 어딘가에서 도선국사 복원부도가 만들어졌으면 했다. 그러나 기계를 사용한 현대인의 기술과 공력이 어찌 옛 명장의 솜씨와 공력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아쉽다. 또한 비석은 본래 화강암으로 된 회색이었는데 검은색 비석이 세워졌다. 아마도 비문 글씨가 잘 보이게 하려고 그리한 것 같다. 이런 내력을 안내판에 표기해 주면 좋겠다. 

그리고 광양엔 도선국사의 도호인 옥룡자에서 이름한 옥룡면이 있다. 옥곡과 광양읍 사이에 국사봉이 있고, 진상과 진월 사이에도 국사봉이 있다. 백운산 줄기에 도솔봉과 억불봉, 진상에 불암산, 중마동과 광영동 골약동에 걸쳐있는 가야산이 있다. 모두 도선국사와 연관된 지명이다. 이러한 지명을 비롯해서 도선국사 관련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와 문화유적을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살려서 광양이 자랑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가꾸어 나갔으면 한다. 
<글·사진 제공=민점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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