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영의 역사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광양여행-사람 냄새 풀풀 나는
전통시장 자리매김

장시에 대한 자료를 찾다 보니 수군 주둔지였던 다압면 ‘섬진진(蟾津鎭)’의 한 병졸이 장세(場稅)때문에 조정에 올린 글이 눈에 띈다. 강 건너 두치의 장세(場稅)를 두고 운영권에 대한 쟁탈전을 벌인 것이다. 이는 김덕진 교수의 논문에서 나타난 것인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18~19세기 지방장시(場市)에 관한 연구’에서 ‘현재 통영의 관할 하에 있는 전라도 광양의 섬진(蟾鎭)의 재정형편이 어려워졌다. 연유는 기존 광양에서 거둬들인 진전(鎭前)의 장세가 하동으로 이속되고 부터다. 그러니 장세를 다시 광양으로 되돌려 달라’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장계는 비변사로부터 각하됐다. 내용인즉 ‘장세는 지역 수령이 알아서 할 일이다. 진졸(鎭卒)의 병사가 왈가왈부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 고을의 수령이 알아서 할 일이니 조정에서는 권한 밖이다’라고 회신한 것.

김 교수는 이 같은 사례를 들어 ‘조선후기 지방재정의 경우, 기존 재원을 침범해 빼앗는 등 급격한 지출의 증가로 인해 갈수록 열악해 졌다’는 것을 예를 들었다. 이로 인해 지방관청에서는 각종 세원을 새로이 개발해 재정을 충당했는데, 이때 장세도 지방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비로소 징수됐다’는 것이다. 

‘섬진진’ 사례에서 보듯, 장세가 지역에 미치는 경제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임을 알 수 있는데, 소화20년(1937년)당시 광양의 4개시장(광양·옥곡·진상·다압)의 총 매매금액은 농수산물을 합쳐 25만7782원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 1원은 현재의 1만4285원정도 된다고 하니 광양 각 시장에서 거래되는 매매 금액이 지역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광양 5일장
광양 5일장

5일장은 3·1만세 운동의 성지
3·1만세운동은 ‘광양 장날’을 이용해 벌어졌다. 광양에서는 3월 3일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3월 27일과 4월 1일 다수가 모인 가운데 시위운동이 벌어져 4월 말까지 이어졌다. 옥룡면 추산리 543번지에 살던 정성련(1879~1922)은 광양 최초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옥룡 자택에서 태극기 3본을 만들어 1919년 3월 27일 ‘광양장’을 이용해 단독으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일부지만 광양장날 만세운동을 벌인 의사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성련 선생. 그는 광양 최초 자택에서 태극기 3본을 만들어 27일 광양장날을 이용해 단독으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하다 체포되었다.
정성련 선생. 그는 광양 최초 자택에서 태극기 3본을 만들어 27일 광양장날을 이용해 단독으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하다 체포되었다.

△김상후(1869~1944 옥룡 운평리 656번지) △박용래(1875~1959 옥룡면 죽천리 803번지) △정귀인(1885~1946 옥룡면 죽천리 1034) △서경식(1886~1938 옥룡면 산남리 330) △김석용(1894~1955. 광양읍 인동리) △박용수(1901~1985. 광양읍 인동리 312) △김영호(1904~1981.광양읍 인서리) △임태일(1898~1959.진월면 송금리 540-3) 

이처럼 광양장날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당황한 일제는 정성련, 김상후 등을 체포하는 한편 진압에 적극 나섰다. 당시 만세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주민들 또한 3·1운동을 전개했다는 혐의로 일경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그 후유증으로 평생 불구로 살다가 죽음에 이르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일부는 공훈이 인정돼 독립유공자가 됐다.

광양시장 확장
매일신보는 대정 7년(1918년) 6월 19일자 지면에서 ‘광양시장 확장’을 기사화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양시장 면적은 현재 1680평인데, 근래 상업이 발달됨에 따라 시장이 협소한 관계로 그동안 협의한 ’우시장‘을 각 방면으로 확장하기로 신청중에 있었다. 그 와중에 15일부로 인가가 나서 확장에 나서게 됐다.

광양시장 확장을 보도한 매일신보(1918년 6월 19일 기사)
광양시장 확장을 보도한 매일신보(1918년 6월 19일 기사)

광양시장 이전
조선일보는 1937년 6월 10일자를 통해 광양시장이 이전했음을 알렸다. 기사 요지는 종래 광양시장은 협착하야 일반은 매우 불편을 느끼는바 광양읍에서는 기전광양공보교기지(其前光陽公普校基地)에다 상당(相當)한 비용을 들여 신시장(新市塲)을 설비(設備)해 놓고 지난 오월삼십일(五月三十日)부터 개시(開市)하였다 한다.

위 기사에도 나타났듯이 광양시장은 확장 이후 20년 만에 확장 이전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기존 광양5일장은 광양 성안에 자리했었고, 이후에는 칠성리로 옮겨지고, 1937년 5월 30일 광양서초등학교 부지로 옮긴 것을 알 수 있다.

옥곡에 ‘건겸장(갈대시장) 신설’
1920년대 광양은 양잠(누에 사육)군으로 유명해 옥곡에 ‘갈대시장’이 신설된 것을 알 수 있다.

매일신보는 1923년 11월 24일자 기사를 통해 ‘옥곡면에 ’건겸장(乾蒹場)신설‘을 다뤘다. 광양군은 도내에서 양잠군으로 유명해 현재 연간 8만원에 달해 성황이다. 기존 읍내에 있는 1곳의 ’건겸장‘으로는 군내 다수의 ’건겸‘에 응할 수 없는 형편으로 옥곡에 건겸시장을 신설하게 됐다.

옥곡면 ‘갈대시장 신설’을 보도한 매일신보
옥곡면 ‘갈대시장 신설’을 보도한 매일신보

기사 요지는 이렇다. 광양은 누에 사육으로 지정된 군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누에를 사육하는 데 있어 꼭 필요한 것이 갈대로 엮은 발이다. 누에는 건조한 것을 좋아하고 습한 것을 싫어하기에 매년 가을에 베어둔 갈대로 발을 만들어 누에를 키우는 데 받침대로 사용했다. 하지만 광양읍내에 있는 기존 1곳의 갈대시장으로는 그 수요를 충당할 수 없어 옥곡면에 갈대시장을 신설케 된 것이다.

3곳 남은 광양·옥곡·진상 5일장
숱한 세월을 감내해 온 우리지역 5일장은 현재 광양·옥곡·진상 3곳이 유일하다. 진월의 ‘사평장’과 다압의 ‘신원장’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기존 3개 시장은 상설시장인 광양읍의 ‘매일시장’과 중마동의 ‘중마시장’과 함께 현대화에 맞춰 깨끗하게 단장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70년대 광양5일장
1970년대 광양5일장

세월은 흘렀지만, 5일시장과 상설시장은 날짜와 상관없이 시민들 삶속에 흥겨운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장으로 발걸음을 옮겨보라. 장터에 들면 먼저 수박과 무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국밥에 막걸리를 곁들이는 시민들과 국수와 팥죽을 기다리느라 줄을 서 있는 모습도 눈에 띈다. 울긋불긋한 각종 과일과 채소를 비롯, 돌게와 우럭조개, 붕장어 손질도 분주하다. 봄을 맞아 각종 묘목도 즐비하다. 또 산지에서 재배된 잡곡이 도·소매되고 약초도 제법 눈에 띈다. 제법 값이 나가 보이는 애완견도 있고 닭, 고양이 등의 동물은 물론 의류나 신발, 생필품 같은 공산품도 있다. 온갖 공구류와 생필품을 트럭에 치렁치렁 매달고 장사하는 이도 있다.

어제(28일) 진상장에서 봤던 뻥튀기 아저씨가 오늘(29일)은 옥곡장에서 전을 폈다. 그래서 장똘뱅이다. 명태머리 전집을 지날 때면 꼭 만나는 이들이 있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이렇듯 우리지역 시장에 얽힌 옛 추억 한두 개쯤 안 가진 사람이 있을까…. 시장은 빛바랜 기억을 되살리는 것처럼, 대기업의 대형마트가 골목상권과 시장을 위축시켜도 새로운 활력이 생기는 우리의 전통 5일 시장은 그래서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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