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초, 맹하(孟夏)가 아니라 성하(盛夏)의 계절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필자가 산본마을을 방문한 지난 토요일은 뜨거운 기운이 벌써 턱밑까지 차올랐다. 막 모내기를 마친 들판에는 연초록 벼잎들이 때이른 무더위를 사랑하는지 열심히 생명의 물을 흡입하고 마을 뒤 서산(西山) 밤나무들은 야릇한 냄새를 뿜는다. 마을에는 매실 수확철이라 그런지 사람은 만나기 어렵고 산비둘기 소리만 가득하다. 마을회관에 들어서니 할머니 몇 분이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거의 매일 점심 식사 후 자연스럽게 모인단다. 덕례리에서 살다가 스무 살에 이 마을로 시집을 왔다는 이덕순(92세) 할머니께 마을의 자랑거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뭐 자랑할 게 뭐있나? 이만큼 살았으면 됐제”하시며 웃으셨고 다른 분들도 맞다고 거들었다. 

前 산림조합장 김영원 씨(86세)
前 산림조합장 김영원 씨(86세)

이장과 약속 시간이 아직 일러 15대 광양산림조합장을 하신 김영원 어르신을 뵈었다. 아직도 경운기를 몰며 대부분의 농사일을 혼자 하신단다. 몸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타고난 건강이 있겠지만 매일 하는 노동이 근육세포들을 새롭게 하는 것일까? 마당에는 밭일을 서둘러 마친 자녀들이 마늘이며 양파, 매실 등을 바리바리 싸느라 분주했다. 그들은 전쟁 같은 도시 생활에 필요한 무기들, 고향의 추억이나 부모님의 사랑 등을 채곡채곡 트렁크에 쌓고 있었다. 어르신은 마을 뒷산 즉 서산을 가리키며 리기다소나무와 밤나무 산으로 필자의 시선을 끌었다. “저게 다 우리가 조림을 한 거야. 군청이랑 같이” 뒷말은 안 하셔도 좋았지만 어르신의 말씀에 겸손함이 느껴졌다. 선거를 치르는 조합장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자영농으로 전업하셨단다. 큰 나무가 산을 지킨다면 겸손한 노인은 마을의 보배일 것이다. 

마을 이장 안두안 씨
마을 이장 안두안 씨

기다렸던 안두안(75세) 이장님이 오셨다. 그도 나이에 비해 매우 건강해 보였다. 약간 무뚝뚝한 표정으로 “뭐땀시 그래싸요? 바쁜디. 요즘 새벽 다섯 시에 인나요” 하셨다. 고사리밭 삼천 평에다 감나무와 벼 농사까지 직접 하신다는 그를 붙잡고 있자니 송구한 마음이 들었다. 이장은 올해 6년 차로 코로나로 인해 내년까지 7년 채우면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의 최대의 업적은 2020년 준공한 32평 규모의 마을회관 건립이다. 출향 인사를 포함하여 주민들이 7천만원 넘게 모금이 된 마당에 시에서 갑자기 예산이 삭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단다. 자신의 모든 연결망을 총동원하여 어찌어찌 다시 2억5천만원을 부활시켜 마을회관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이번에는 하도급을 맡은 회사가 마을 통장에 압류를 신청하여 무진 애를 먹었단다. 필자도 마을 일을 맡아 일을 해 본 적이 있어 속 터지는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인사를 하려는 필자에게 마을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이 있다며 몇 번이나 반복하는 말 속에 뜨거운 마을 사랑이 전해졌다. 그 사업이란 마을 뒤 산자락으로 소방도로나 농로를 내는 것이다. 길이 없다면 최첨단 농기계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길을 내려면 시 당국의 지원과 함께 농지 소유자들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늘에서 본 산본 마을
하늘에서 본 산본 마을

드론 카메라로 하늘에서 산남 마을을 모두 담으려면 수 백미터 상공을 날 수 있어야 한다. 지면에 실린 사진은 산본 아랫 마을 평촌(평더리)까지 담아내지 못했다. 그만큼 큰 마을이라는 것이다. 표지판 기준 190여년을 산 당산나무가 있는 평촌을 포함하여 산본마을은 87세대에 주민등록 상 150여명 거주하고 있다. 어림잡아 노약자, 농삿일, 외부 직장이나 자영업 각각 1/3 씩 구성되어 있다. 최근 면소재지로 가는 신재길 따라 상가나 주택이 점점 늘어나 소위 도시연담화 현상이 보이고 있다. 그만큼 사람이 많이 오가고 교통량이 증가하고 있다. 

마을 동북쪽 산본저수지
마을 동북쪽 산본저수지

산본마을은 동천을 앞에 두고 뒤로는 서산 자락 아래 길게 펼쳐져 있다. 마을 좌측에는 월파, 우측에는 남정, 동천 건너에는 재동 마을이 있다. 마을 오른쪽 어깨 위 가무고개 아래 산본저수지가 있어 벼농사의 젖줄이 되고 있다. 주로 논농사와 산을 이용한 밤, 매실, 고사리 재배나 비육우 생산 등이 주 수입원이다. 

그런데 2005년 간행된 시지(市誌)에 산본저수지(저수량 17.1 천톤)는 1943년 준공된 것으로 쓰여 있고 주민들도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나, 정부의 공식 누리집(www.korea.kr)에서 ‘전국 시군구 관리 저수지 현황’으로 검색하면 1954년으로 나온다. 광양시에서 무엇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보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저수지의 수명은 보수 공사의 기초 자료가 되고 주민들의 안전과 관련된 사항이기 때문이다.

마을에는 고인돌이 다섯 곳에 걸쳐 있다. 그 중 개똥골 칠성바우를 중심으로 10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수풀이 우거져 표지판을 찾는데 애를 먹었다. 진입로라도 정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선사시대 우리 조상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전하는 이야기로는 1850년경 밀양 박 씨들이 저수지 안쪽에 정착하여 지금도 이곳을 원동(元洞)이라 한다.

마을샘
마을샘

새미정골에는 물맛이 좋다는 우물이 남아 있지만 지금은 허드레물로 사용한다. 

독립유공자 서경식
독립유공자 서경식

산자수명하니 인물도 많다. 산본의 자부심은 애국지사 서경식(1886-1938)이다. 초등학생들에게 광양에도 1919년 기미만세운동이 있었을까 하고 물으면 대답을 얼른 못한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어떻게 광양에 전파되었을까 생각하는 모양이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그해 3월 27일 유생 정성련이 독립만세를 외쳤고, 이어 4월 1일 장날 광양읍 읍내리에서 서경식, 박용래, 정귀인 등이 주도하여 1,0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당당히 체포되어 징역 8개월을 살았다. 1992년 뒤늦게 대통령표창 서훈을 받았다. 

광양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산본마을도 여순사건과 6·25의 상처를 안고 있다. 해방 후 나라가 아직 제 모습을 갖추기 전 제각각 자기 주장을 펼치는 가운데 정권을 잡은 이승만 정부는 민중들의 핵심적 요구(자주통일민족국가 수립, 친일 청산, 토지 개혁 등)를 실현하지 못했다. 지도자들의 무능과 오판은 결국 내부의 분열과 남북간 전쟁을 나아가 조용한 농촌 마을에까지 소용돌이를 초래했다. 이 마을 출신 김준기 씨는 우익성향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청년단장으로 제헌의회에 출마할 정도로 똑똑한 인물이었으나 여순사건 당시 빨치산을 공개 비방했다가 좌익에 의해 끌려가서 처형되었다고 그의 조카가 증언해 주었다. 마을 입구 오른쪽 작은 동산은 학 모양을 닮았다고 두루미산이라 불리는데,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여순사건 피해자들의 시신이 많이 버려져 어릴 적 땔감을 위해 솔잎을 긁어모으면서 발견된 해골을 공차기로 이용했다고 한다.

백운산 전몰장병 위령비
백운산 전몰장병 위령비

여순사건은 6·25로 이어졌다. 14연대 군인들이 백운산과 섬진강 너머 지리산에 스며들면서 산자락 주민들은 길고 긴 야만의 시대를 견뎌야 했다. 70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트라우마는 살아있다. 밤이면 빨치산들이 식량과 의복과 약품과 정보를 구하러 마을로 내려오고, 낮이면 군경이 찾아와 빨치산이 누구 집에 들렀다는 것만으로도 주민들은 목숨을 요구했다. 총칼을 들이밀며 음식을 달라고 하면 무슨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살기 위해 이웃을 손가락질하고 자신의 반공의식을 증명하기 위해 주민들은 의용군으로 참여하다 백운산 어느 계곡에서 산화되었다. 마을 입구 작은 두루미(학)산 한 쪽에 「백운산지구전몰장병위령비」 가 서 있다. 이곳에서 6·25 중 ‘공비토벌’ 작전을 위해 지프를 타고 올라가는 허정수 소령이 매복 기습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그를 포함한 44명의 군장병의 영혼을 위로하는 비석이다. 옥룡초등학교 교정에는 같은 기간 희생된 옥룡면민 115명의 영혼을 위로하는 「전몰호국용사추모비」가 있다.

백운요 도예가 김정태(55세)
백운요 도예가 김정태(55세)

두루미 산자락에 백운요(白雲窯)가 있어 마을의 품격을 높혀 주고 있다. 도예가 중산 김정태와 그의 아내 토우작가 신효정은 옴팡진 마을의 아름다운 곡선을 빚어낸다. 흙이 가진 고유의 성질에 불꽃과 잿물의 의도하지 않은 형태와 빛깔을 의도적으로 만들어가는 새로운 차원의 분청사기의 맥을 잇는다. 생계를 위해 생활도자기와 학생들의 체험학습도 하지만 이들의 예술혼은 꺼지지 않고 있다. 산본마을에는 백운요 말고도 라이프 아트(Life Art)를 추구하는 모기태 화백이 15년 전 입주하여 살고 있다. 가까운 곳에 그림 카페를 운영하다가 여동생에게 물려주고 지금은 작품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예술 작품을 생활 속에 가까이 즐기자는 신념으로 최소한의 노동 비용 개념만 적용한다고 한다. 할 수 있다면 각 가정에서 몇 작품을 구입하고 이웃 간에 매해 무상 임대하는 공유 방식은 어떨까 싶다. 

이웃 마을에 사는 필자는 같은 산남리 주민으로서 산본과 남정 뒷산 둘레길이나 소방도로 건설 같은 것을 공동으로 추진하면 어떨까 싶다. 물론 섬배기(하천솔밭공원)를 가족생태공원으로 가꾸어 나가면 좋겠다. 농촌은 근원부터 자연과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지고 서로 의존하는 곳이다. 지금 대한민국 농촌은 거대한 양로원이 되었다. 앞으로 농촌의 살길은 지친 영혼을 가진 현대인들이 잠시라도 아름답고 생태적인 공간에서 사람 사는 정을 느끼고 공동체가 무엇인지 체험할 수 있도록 변모해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산본 이장님이 말씀하셨듯, “시 당국의 지원과 함께 농지 소유자들의 결단이 필요하다” 
이글은 이렇게 마친다.

글·사진=박발진 광양문화연구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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