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 하나. 광양에서 용이 세 마리 사는 동네는 어디일까요? 정답, 옥룡면 용곡리 흥룡마을.

우스게 소리이지만 마을 사람들의 자부심이 뿜뿜 넘치는 이야기이다. 동천을 벗하는 신재로를 따라 올라가다 면사무소 지나면 대방교회가 나온다. 교회 옆 다리를 건너면 바로 흥룡이다. 강가에 바짝 닿은 초암마을이 오른쪽에 있고, 왼쪽에는 대방마을이다.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응골이라 불리는 마을 뒷산이 용이 하늘로 오르기 위해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흥룡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 용은 상상의 동물이라 확인 불가능하고 대신 호랭이굴이라는 지명이 있다. 길이 강과 벗하듯 상서로운 동물들도 순박한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었을까?

우)흥룡마을, 좌)대방마을
우)흥룡마을, 좌)대방마을

 

흥룡은 현재 42가구에 70여 명의 주민들이 벼, 감, 매실 농사를 하고 있다.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연로한 어른들이 버거운 농사를 하고 있다. 햇살이 좀 누그러진 오후 여섯 시경 마을회관에 들어서니 할머니 일곱 분이 저녁 식사를 끝내고 귀가 준비를 하고 계셨다. 75세부터 88세까지 열두세 분이 오전에는 집안일을 하고 매일 오후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다가 저녁 식사를 해 먹고 귀가하신다. 요양원 대신 기쁨과 슬픔을 평생 함께 나눈 사람들과 자기 마을에서 노후를 보낼 수 있다면 말년의 큰 복일 것이다. 노인들이 좀 더 청결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편리한 식사 준비와 즐거움을 나눌 수 있도록 마을 회관 시설이 보완되면 좋겠다. 

회관 가까이 용수정(龍守亭)이 있는데 이는 애향심이 강한 서정수 씨의 아들들이 세워 마을에 기부했다. 2005년 간행된 시지(市誌)에는 ‘龍水亭’으로 되어 있는데 현판에 실린 한자대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서형흠 효자비
서형흠 효자비

 

흥룡마을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두 그루의 정자나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수령 500년 정도의 느티나무이다. 보호수이지만 잡초가 우거져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1905년 국가의 명으로 문중에서 건립한 서형흠(徐馨欽) 효자비가 있어 이 마을의 풍속을 느끼게 해 주었는데 비석 주변도 잡초로 무성하다. 오늘날 부모의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시묘살이를 할 수는 없지만 서형흠의 효도하는 정신은 마을 사람들에게 길이 이어질 것이다.

흥룡이장 서재석 씨
흥룡이장 서재석 씨

 

이장 서재석 씨에게 전화를 했더니 장거리 출타 중이다. 여행사를 경영하며 직접 관광버스 운전도 한다. 젊어서 객지 생활을 하였으나 28세에 고향에 정착하였다. 요즘은 휴대폰을 이용해 이장 업무를 대부분 하기 때문에 ‘투잡’을 해도 큰 어려움은 없단다. 대신 부녀회장과 노인회장 두 분이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귀띔해준다. 바라기는 좁은 마을길을 좀 더 넓게 하는 것이 마을 발전의 장기 과제라고 하였다.

백운산 정상이 훤히 보이는 흥·대방에는 예쁜 새집들이 늘고 있다. 새로 이사 온 사람을 통해 마을의 인심과 사정을 들어보려고 동네 한바퀴를 하다 특별히 한 건물이 눈에 띄었다. 화초에 열심히 물을 주고 있는 이미정 씨에게 말을 걸었다. 2년 전 큰 아이가 대학 진학을 하고 늦둥이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찾다가 자연을 큰 스승으로 삼고자 이곳으로 오게 되었단다.

태양광 시설이 들어선 옛 점토골
태양광 시설이 들어선 옛 점토골

 

비탈지고 평범한 밤밭에 놓일 그림 같은 정원과 주택을 상상할 수 있는 그녀의 예지력이 놀라웠다. 마을 분들이 친절하고 잘 해 주셔서 불편한 점은 없단다. 부디 이웃들과 잘 어울려 좋은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가시길 바란다.

다음은 대방마을이다. 위쪽으로 항월마을이 있고 아래쪽으로 흥룡이 있다. 흥룡과는 한 동네처럼 붙어있어 예부터 마치 ‘흥·대방’이라 부른다. 

대방의 옛이름은 연화촌(蓮花村)인데, 훗날 마을 뒷산을 달에, 마을을 꽃에 비유하여 ‘달뜬 아래 꽃다운 마을’이라는 의미로 ‘大芳’이라 했단다. 5년 전 왕금지구에 한옥 25가구가 들어서면서 대방은 답곡, 추산 다음으로 세대수가 많은 큰 마을이 되었다. 요즘도 계속 집들이 들어서고 있다. 

마을 뒤로 백운산 줄기가 이어졌는데 밤꽃 만발한 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멀리 동북쪽 산자락에는 대규모 태양광 단지가 보인다. 이곳은 예전에 옹기를 굽던 점텃골이 있었다. 마을과도 꽤 거리가 있지만, 멀리서 보아도 큰 상처가 백운산 얼굴에 생긴 것처럼 안타깝다. 

노인회장 서정화(84) 씨
노인회장 서정화(84) 씨

 

올해 4년 차 이장직을 맡은 박경대(53) 씨는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25년 동안 꿩 사육하고 있다. 신문에 실을 사진을 찍고자 했으나 한사코 사양한다. 낮에는 꿩 사육, 밤에는 읍내에서 치킨집을 하면서도 마을 이장까지 맡아 무척 힘들 것으로 생각했지만 여유로워 보였다. 아마도 사육장이 있는 숲속의 기운이 아닐까 싶다. 사육장에는 수 천 마리 아기 꿩들이 병아리 같은 소리를 내었다. 봄 여름에 키워 가을 겨울에 꿩탕을 하는 식당에 공급한다. 가까운 곳에 이런 대규모 사육장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마을 현안은 마을에서 진상 웅동(곰골)까지의 도로 개설이다. 1980년 4km 전술도로가 만들어졌고 이후 “지질조사와 환경영향조사 및 설계까지 마쳤는데 아직 착공을 못하고 있다”고 아쉬어 한다.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의 소통과 교류는 길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면 서로 합의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필자는 직접 그 길을 확인해 보고자 코란도를 몰고 경계지점인 대방재까지 올라갔다. 이 길은 백운산 둘레길로 선비누리길이라는 이름이 있다. 조용한 숲길이라 걷기에는 좋지만 포장도로가 아니라 승용차로는 쉽지 않을 것 같다. 

회관에서 약 2km 정도 달리니 왼편에 송학사라는 큰 사찰이 보인다. 은둔 수행에 전념하고 싶은 주지 스님의 뜻인지 안내 표지판은 없다. 다음 날 전화로 물어보니 선각종 소속의 사찰로 1992년에 세워졌단다. 안내푯말을 따라 꼬불꼬불 길을 가다가 너른 편백나무 숲을 만났다. 차에서 내려 사진 몇 장을 찍고 피톤치드를 흠뻑 마실 요량으로 심호흡을 수차례 하였다.

대방마을 왕금한옥촌 (사진=Nalda 제공)
대방마을 왕금한옥촌 (사진=Nalda 제공)

 

목적지 대방재(해발 584m) 사거리 이정표에는 대방 3.5, 웅동 3.7, 대치재 4.6, 국사봉 6km 표시가 되어 있다. 좀 더 안전하고 편안한 길을 만들어 이웃으로 서로 왕래뿐만 아니라 외부 관광객들이 더 다양한 광양 구석구석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속히 마을 주민들의 숙원이 해결되길 바란다.

마을회관에서 노인회장 서정화(84) 씨를 만났다. 젊어서 태권도 사범을 한 덕인지 매우 건강해 보였다. 44년을 함께 한 배우자를 먼저 보내고 8년 동안 홀로 지내셨다. 어린 시절 너무 가난하여 중학교를 못 다녀 잠시 방황했는데 태권도를 배우며 마음을 잡았다 한다. 박정희 정권 시절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 10여 년 이장을 하면서 마을길도 넓히고 농토도 구입하였다. 여순사건 당시 이 마을에도 진압군 형과 봉기군 14연대 군인 동생이 함께 끌려가 처형당하는 비극이 있었다고 전해 주었다. 

대방에는 강윤문(39) 씨가 운영하는 도예공방이 있다. 흙을 이용한 학생들의 만들기 체험활동도 하지만 토우(土偶)를 주로 만든다. 요즈음 그는 ‘백운산마을학교’ 교사로서 솔밭섬 공원에서 2주간 유치원 아이들과 자연놀이 프로그램을 즐기고 있다.

마을에는 도예 공방처럼 또 하나의 멋진 공간인 카페 ‘그냥’이 있다. 주인 강명심(58) 씨는 합창 연습을 하러 막 외출할 참이었다. 13년 전 건강 회복을 위해 이곳에 왔단다. 약초 캐기와 가게 운영으로 몸은 더 바빠졌지만 음식을 나누며 주민들과 밀착되게 산 덕에 건강이 회복되었다. 

최근에 개량 한복 사업을 접고 다양한 음식 메뉴 개발에 힘쓰고 있다. 수입이 어느 정도인지 묻지 않았지만, 카페가 있어 찾아가고 싶은 동네를 만드는데 기여하고 있다.

왕금 한옥촌은 원 대방과는 다른 마을처럼 떨어져 있지만 행정적으로 한 마을이다. 왕금(王金)이란 예전에 하얀 색깔의 흙이라는 백톳거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일제 강점기 금을 채굴을 해서 왕금이라는 말이 더해졌다고 한다. 외지인들이 조합을 결성해서 왕금산 만여 평을 개발하여 지금은 영화촬영장 같은 멋진 한옥촌을 만들었다. 전부 한옥이지만 집의 규모나 형태는 제각각 개성이 있다. 25가구 중 대여섯 집이 민박을 하고 있어 투숙객도 있지만 관광이나 견학 목적의 외부 방문객도 적지 않다. 주로 은퇴 연령층이 살지만, 퇴년 후 재취업자도 많다.

한옥촌 3대 회장을 맡고 있는 배병춘 씨는 “한옥촌의 당면 과제는 독립 마을이 되는 것입니다. 마을 회관 건립 부지까지 준비해 두었고 장차 한옥 축제 같은 공동체 사업을 해보고 싶습니다”고 하였다.

모두 외지에서 귀촌한 직장인들로 농사짓는 가구는 거의 없어 기존 주민들과 여러 면에서 공감대 형성이 어려워 보인다. 25가구 미만의 독립 마을이 많은 현실과 기존 주민들도 동의하고 있어 시 당국이 큰 비용이 드는 것이 아닌 한옥촌의 ‘분가 독립’ 주장에 적극 호응하였으면 좋겠다. 왕금 한옥촌이 광양의 힐링 명소로서 거듭나고 훗날 지방 유형문화재로 잘 보존되어 단순한 민박을 너머 조용한 영혼의 쉼터가 되기를 기대한다. 

마을의 자연, 역사나 인물, 특징, 산업 등을 살펴보면 어느 마을이나 책 한 권으로도 다 담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내 마을에 대한 역사를 발굴하는 ‘마을 이야기책 만들기’ 같은 마을공동체 사업을 우선 하여 주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한다면 다음 과제는 훨씬 쉽게 풀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글·사진=박발진 광양문화연구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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