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이균영백일장 고등부 대상┃박건우

한국문인협회 광양지부가 주최·주관한 제1회 이균영 백일장이 지난 5월 11일 성황리에 마무리 됐다. 광양시민신문은 청소년의 문학적 역량을 높이고, 결실의 가치를 공유·응원하기 위해 수상작을 매주 선보일 계획이다. 

느즈막한 밤에 눈이 뜨였다. 강한 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렸다. 어둠이 창문을 깨뜨리려고 애쓰는 것 같아 빠르게 벽장을 열어젖혔다. 온화한 아버지의 웃음이 방 안을 환히 밝혀 주는 느낌이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적에 함께한 기억이 많지 않은데도 아버지 사진만 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신기한 노릇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사별한 뒤 어린 나를 이끌고 시골에 터를 잡았다. 슬픔에 취해서 그래, 금방 서울로 돌아오겠지, 라는 주위 반응과 달리 아버지는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집과 밭을 소개했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익숙지 않은 시골 내음에 코를 쥐어 막고 있던 나를 향해 아버지는 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앞마당에 사과나무 한 그루 심으면 딱이겠다, 그렇지?” 

아버지는 이사 온 이튿날부터 밭일에 매진했다. 땅을 뒤엎고 작물을 심고…. 사과나무 묘목을 마당에 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꼭두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한 차례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학교에 다녀오면 늘 나 혼자였다. 몇 년이 흐르고 사과나무가 첫 열매를 맺던 해였다. 서울에서 사무직을 맡아 언제나 새하얬던 아버지의 피부는 어느새 사과나무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짙어졌다. 어느 정도 머리가 자랐던 나는 그제서야 용기를 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왜 그렇게 열심히 밭일을 하세요. 여기로 이사 온 뒤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단 한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고 밭일만 하셨잖아요”
“서운했니?”  
“저랑 같이 있는 시간은 잠잘 때뿐이었잖아요. 아니, 집 대문에 드는 순간에도 저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잖아요. 저 한 번 씻겨준 적 없으면서 사과나무는 매일 닦아 주고, 제겐 영양제 한 통 사 준 적 없으면서 사과나무에는 영양제 떨어질 때마다 새로 꽂아 주고 혹시, 엄마에 대한 기억을 잊으려고…”
아차, 싶었지만 흘러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나를 한참 노려보다가 넌지시 말했다. 
“잊으려고 하는 게 아니야. 기억하려고 하는 거란다” 

나는 아버지의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과로로 쓰러지고 골든타임을 놓쳐 앰뷸런스 안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도. 나는 울지 않았다. 화장 직전 마지막으로 퍼석퍼석한 그 손을 잡을 때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수면유도제를 먹어도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거의 쓰러진 김에 잠드는 수준이었다. 며칠간 분투했지만 밤낮이 바뀌고 말았다. 부엌 불을 켰다. 간단히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 심산이었다. 물이 끓어오를 때쯤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가스 불을 끄고 나가 보니 이장님이었다. 

“산책 나왔다가, 오랜만에 불이 켜져 있는 것 같애서” 이장님은 사과나무 이파리를 만지작거렸다. “느이 아부지가 이 나무를 참 애꼈제. 그새 생기를 잃어버렸구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내게 이장님이 나무에서 갓 뗀 사과를 쥐어주며 말했다.

“느이 아부지, 살아생전에 돌아가신 느이 어무니 이야기 참 많이도 했다. 아리따우면서도 올곧은 게 사과나무 같은 사람이었댜. 그래서 마당 딸린 집에 이사 오자마자 사과나무를 심어두고 싶었다 안 하나. 고된 일 끝내고 아내와 함께 씻는 게 일생의 행복이었다더라” 

잊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기억하려고 한다는 아버지의 말. 그 말이 이제야 이해됐다. 이장님이 집으로 돌아가시고, 라면을 끓여 먹고 나서 보니 새벽 두 시가 다 돼 갔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시원했다. 정확히는 시원함과 쓸쓸함 그 중간 어디께였다. 사과를 베어 물었다. 적시에 따지 않아서인지 푸석푸석했다.

마치 마지막으로 붙잡았던 아버지의 손가죽처럼. 벽장을 열고 옥빛 항아리를 꺼냈다. 아버지의 유골함이었다. 천천히 마당으로 나와 사과나무 앞에 섰다. 유골함에 손을 집어넣고 한 움큼 뼛가루를 쥐어 사과나무 아래에 뿌렸다. 한 움큼, 또 한 움큼. 뼛가루가 바닥을 드러낼 때쯤 동편 하늘에서 해가 떠올랐다. 유골함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사과나무를 바라봤다. 내년에도 후년에도 사과는 열리겠지. 사과나무를 기억하는 것, 이것이 내가 아버지를 기억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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