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훈 광양제철고 3학년

답사는 끝나가고 있었다. 저녁을 먹었고, 하늘의 색이 바뀌고 있었다. 일전의 답사지였던 정병욱 생가를 마지막으로, 몸은 나른해지고,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다음에 어디를 가던 쏟아지는 졸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음은? 버꾸놀이를 관람하고, 윤동주 선생님과 정병욱 선생님 후손들의 강연을 듣는 순서다. 아, 이대로 가면 강연 때 무조건 잔다 싶었다. 
정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강연장에 들어갔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 전까지의 답사는 기억이 나지 않고, 그다음의 이야기는 지루해질 정도로, 버꾸놀이는 나의 마음을 채운 것이었다. 

무엇보다 신기했던 것은, 그렇게 많은 요소가 들어가 있지 않음에도, 도취와 자아상실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춤과 박자, 추임새. 이게 명인의 몸짓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물론 너무 어린 제고생들이 호응을 크게 하지 못하고, 추임새도 소극적으로 넣은 것, 닫혀있는 마음 때문에 진실로 자신을 잊고 무대를 즐기지는 못한 점이 아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느꼈고, 실제로 아주 잠시, 나는 나를 잊고 박수치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도취, 자아상실 등은 니체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단어들이다. 비극이라는 예술을 설명할 때, 비극의 어느 한 면을 설명하기 위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란 개념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나는 이 개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면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의 특징은 앞서 말했듯이 도취와 그것을 향유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포기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인데, 그런 특징을 가진 예술을 감상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을 감상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물어보겠지만, 그리스 비극의 상연을 기다릴 수도 없고, 그리스 비극은 디오니소스적인 면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버꾸놀이를 감상하고, 디오니소스적인 것, 도취와 황홀경, 자아상실 등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명인의 박자에 맞춰 함께 박수치고 소리지르는 과정에서 그 순간에 이 예술의 일부분이 되는 경험. 물론 니체가 말한 의미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이 경험이 그 의미를 이해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나는 상기한 경험을 통해 전통문화의 가치가 무엇일지 고민할 수 있었다. 전통문화는 우리의 삶과는 떨어져 있지만, 결국 우리가 공유할 수밖에 없는, 한국인의 정체성과는 너무나도 가깝기에,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하거나 예술을 공부할 때는 전통문화로 회귀해, 그 이론들을 적용해가며 우리의 가치관에 맞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전통문화들은 대부분이 원시적인 예술의 모습을 보이는데, 예술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삶을 그려내기에 이런 전통예술을 공연하는 것은 인간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예술의 발전과 더불어 인문학의 발전에 있어 무궁한 가능성을 지닌 전통문화를 지키고, 그 아름다움을 느끼며 적극적으로 향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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