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문화 산책

대학 1학년 여름방학에 여고 친구들과 무주구천동에 놀러 갔다. 그곳에 머무는 3일 내내 비가 내렸다. 민박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다가 여행 마지막 날에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백련사까지 걸었다. 계곡을 타고 오르면서 그 유명한 무주 구천동은 언제 나오는 거냐며 푸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명성에 걸맞지 않게 그곳은 실개천이었다. ‘금강산 중은 금강산 좋은 줄 모른다더니’ 우리가 그 꼴이었다. 물 많고 깨끗한 옥룡 계곡을 지척에 두고도 우물 안 개구리로만 살아온 광양 여자 여섯은 그 가치를 몰랐던 것이다.

이제는 안다. 햇빛 고을인 데다 백운산을 끼고 있어 일 년 내내 마를 일 없는 샘을 가진 천혜의 땅이 광양이라는 것을. 백운산에서 나는 임산물, 섬진강과 남해에서 나는 풍부한 식재료로 산해진미를 만들 수 있는 곳이 바로 내 고향 광양이라는 것을. 한 번 들으면 잘 잊히지 않는 투박한 광양 사투리마저도 정겹게 들리는 건 필자가 그만큼 나이를 먹은 탓일 게다. 

추동(秋洞) 마을
추동(秋洞) 마을

옥룡면사무소를 지나 골짜기를 타고 오르면 다리가 나온다. 오른쪽으로 꺾으면 죽천리와 동곡리가 나온다. 백운산 자연휴양림이 있는 곳으로 직진해 만나는 마을이 추산리다. 오른쪽 골짜기보다는 작지만, 그곳에는 천년 숲 동백림과 시민들의 편안한 산림욕장이 돼 주는 백운산 자연휴양림이 있다. 그뿐이랴. 비 오는 날이면 파전과 동동주, 두부김치만으로도 분위기를 낼 수 있으며 성공한 농촌 체험학습장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도선국사 마을도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추동리(秋洞里), 상산리(上山里), 중산리(中山里), 하산리(下山里)가 합쳐지면서 추산리(秋山里)가 됐다. 법정리인 추산리에는 세 개의 마을이 있는데 추동마을, 상산과 중산이 합쳐진 양산 마을, 그리고 하산리에서 이름이 바뀐 외산 마을이 있다. 오늘은 세 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인 추동마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한다.

서울대 남부학술림 생활관
서울대 남부학술림 생활관

추산리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남부학술림이 자리한다. 서울대에는 지방 학술림이 세 곳 있다. 경기도 수원시의 칠보산학술림(1928년, 118ha),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태화산학술림(1979년, 795ha), 그리고 이곳 광양의 남부학술림(1946년, 16,182ha)이 그것이다. 광양시와 구례군에 걸쳐 있는 남부학술림은 다른 두 곳의 학술림을 합한 것보다 열여덟 배가 넓으며 서울 여의도의 열아홉 배에 달할 정도로 면적이 넓다. 지리산과 백운산에 두루 걸쳐 있는 남부학술림은 다양한 고도와 기후대를 포함하고 있다. 설립 초기에는 나무를 심거나 씨를 뿌리는 등 인공적으로 숲을 조성하는 일과 접목 또는 조직배양으로 새로운 개체를 만든 뒤 그것을 크게 자라도록 하는 양묘 사업을 했다. 또 숲에서 나는 부산물을 생산하는 등 국가적으로 필요한 임업 시험 연구를 주로 하면서, 우리나라 임학 발전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최근에는 기후 변화 모니터링, 멸종 위기 동식물과 산촌의 지속가능성 연구 등 생태 분야 외에도 경제적, 사회 서비스 가치를 높이는 일에도 힘을 쏟고 있다.

인재가 많은 추동마을
개망초 핀 들길을 조금 더 오르니 추동마을 표지석이 보인다. 모내기를 마친 논에는 눈부시도록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먼 산에는 하얗게 밤꽃이 핀 일요일 오후였다. 때 이른 6월 더위가 한창인 오후 두 시에 추동마을회관에 도착했다. 

회관 한가운데 작은 나무 그늘에서 오늘 만날 이재민 교장 선생님을 기다렸다. 갑자기 뒤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어디서 오싰소?” 허리가 거의 기역자로 굽은 어르신 한 분이 유모차를 끌고 나오면서 물었다. “네. 이재민 교장 선생님과 약속이 있어서 기다리는 중입니다”, “날이 덥구만 회관으로 좀 들어오씨오” 약속 시간이 다 되었으니 금방 오실 거라는 내 말에 재차 권했다. 차마 뿌리칠 수 없어서 들어가니 여자 어른 몇 분이 앉아서, 또 누워서 쉬고 있었다. 

추동마을회관에서 담소중인 마을 주민
추동마을회관에서 담소중인 마을 주민

오가는 말소리에 누웠던 어른 한 분이 일어났다. 동네(추동)에서 동네(추동)로 시집왔다는 김순자(78세) 어르신이었다. 추동마을 자랑을 해달라는 말로 말문을 열었다. “우리 동네는 인심이 좋소. 마을회관에서 점심 때마다 밥을 해 묵는디 먼저 온 사람이 아무나 하요. 다투고 싸우는 일이 없응께. 커피 사오는 사람, 맛난 거 사오는 사람이 많어요” 옆에 있던 다른 분이 말을 잇는다. “그뿐이다요? 추동에는 인재가 많이 나요. 터가 좋은지 높은 사람이 많이 나왔소. 국회의원도 있고, 시장도 여기 출신이오. 또 우리 동네서 면장이 셋이나 나왔소. 옥룡서 제일 큰 마을이 우리 마을이요” 

그러고 보니 이곳은 현 정인화 광양시장의 고향이다. 이외에도 이금하(전 면장), 박순호(공인회계사), 박찬호(전 광주지방검찰청 검사장), 이은항(전 국세청 차장), 이은강(전 서울고검 인권보호관)등 쟁쟁한 인물이 이 마을 출신이다. 동네 사람들이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 “추동 이장할래, 봉강 면장할래?” 물으면 추동 이장한다고 대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단다. 

추동마을 앞 모내기를 마친 논
추동마을 앞 모내기를 마친 논

추동은 인구가 많을 때는 110여 가구에 이르렀다. 앞에 들이 넓어서 농사짓기에 좋았다. 돌을 가려내고 그곳에 흙을 넣어 논을 만들었다. 그 남은 돌로는 돌담을 쌓았다. 지금도 추동마을에는 돌담이 많다. 들에서는 농사짓고 산에서는 나무하기 좋은 환경이니 자연히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전에는 이곳을 ‘가라골’ 또는 ‘가래골’이라고 불렀다. 마을 뒷산이 배(船), 마을 터는 그 배의 돛대 모양이라서 돛대의 재료가 되는 가래나무에서 이름을 따와서 ‘가래골’이 된 것이다. 가래골을 한자식으로 써서 추동(楸洞)으로 부르다가 뒤에 가을 추를 쓴 추동(秋洞)으로 바뀌었다. 나무를 때서 난방하던 시절에는 광양읍 사람들이 구가래골까지 나무를 하러 왔단다.

구가라골마을 입구
구가라골마을 입구

정 씨가 주로 살던 그 동네가 골짜기가 좁아서 불편해지자 다 떠나고 나중에 부동산업자가 터를 닦아서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 구가라골이다. 지금은 7~8가구 정도가 산다. 87가구가 사는 추동마을과는 거리 탓인지 잘 소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에는 냇가 주변에 농막 형태로 집이 지금도 계속 들어서고 있다. 

고산 윤선도의 마지막 유배지
추동마을은 조선시대 유명한 문신이며 시조작가인 고산 윤선도의 마지막 유배지이기도 하다. 그는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다. 그의 나이 79세인 1665년에 이곳에 유배돼 2년 4개월 동안 살았다. 그는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 음약, 지리에도 능통하였으며 특히 시조시인으로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대 시가에서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다. 윤선도가 남긴 「고산유고」에 이 고을에서 지은 시가 전한다. 『광양시지』에는 윤선도 관련해 그가 살던 옛 집터가 이 마을에 있다고 전하지만 정작 마을 사람들은 그 집터가 어딘지 잘 알지 못했다. 김순자 어르신도 종종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곳이 어디냐고 물어서 난감할 때가 있다고 했다.

추동 마을회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이재민 교장 선생님과 마을 주민들
추동 마을회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이재민 교장 선생님과 마을 주민들

이재민 교장 선생님이 덧붙인다.
“윤선도 선생한테 딸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유배해 있는 동안 죽었대요. 외산 저수지 위에 딸의 묘를 썼다네요. 나중에 해남으로 옮기려고 파 보니 의복이 그대로 있어서 그대로 이곳에 묘를 썼다는 말이 전해옵니다”
아쉽게도 마을에서 윤선도 선생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또 일제 강점기 시대에는 금 광산이 옥룡 왕금산 주변에 있었는데 거기서 캔 금을 잘게 부수는 금 방앗간이 추동마을에 있었다고 한다. 금이 한창 생산될 때는 순도 높은 금만 골라서 장항 금 제련소로 보냈다고 이재민 선생은 말했다. 

추동천은 3년에 한 번쯤 물이 넘쳤다. 그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봇도랑을 메우는 울력을 했다. 2002년 8월에는 우리나라를 강타한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이 마을에 섬이 두 개 생겼다. ‘윗섬’과 ‘아랫섬’이 그것이다. 백운산에서 내려온 모래와 자갈이 추동마을 논을 덮쳤다. 집이 부서지고 인명 사고도 생겼다. 방치돼 있던 곳을 광양시가 사들여 2019년 자연생태공원을 만들었다.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생태공원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생태공원

삼정(三精), 옥룡사지 동백숲, 백운산 고로쇠 이야기 등 백운산에 전해오는 신비로운 이야기를 담은 포토존도 있다. 하늘정원, 마운딩 잔디, 사계절 초화류 공원 등으로 나뉘어져 특색있게 꾸며져 있다. 가볍게 산책하고 쉬어 가기에는 참 좋은 곳이었다. 산처럼 높은 언덕을 돌고 돌아서 올랐다. 마치 순천정원박람회가 열리는 해룡 언덕처럼 보였다. 추동마을과 멀리 백운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너른 공원에 투명한 햇살과 바람만이 놀고 있었다. 이 모두가 태풍이 한 일이다. 풍수해 앞에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가. 이후 광양시는 하천을 넓히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간혹 좁지만 물풀과 징검돌이 아기자기 놓여 있던 예전의 하천을 그리워하는 건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글·사진=양선례 광양문화연구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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