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례 광양문화연구회 연구원

산골의 겨울은 몹시 추웠다. 사촌들과 산에 올랐다. 갈퀴로 솔가리와 낙엽을 긁어모으는 일은 처음 하는 일이라 서툴렀지만, 놀이처럼 재미있었다. 이모집과 붙은 바로 뒷산인데도 사촌 언니는 연신 둘째 손가락을 펴서 입술에 대고 말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해 온 나무를 아궁이에 넣었다. 푸른 연기를 내뿜으며 솔가리가 타닥타닥 튀었다. 가늘고 긴 불꽃을 내며 타 들어가는 솔잎이 아름다웠다. 땔감을 구하러 산지기 몰래 산을 드나들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모 집은 옥룡면 추산리 양산 마을에서 있었다. 우리 연구회의 필자 열 명이 옥룡의 법정리를 하나씩 골라 마을 이야기를 싣기로 했을 때 고민하지 않고 추산리를 고른 이유였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향을 떠난 언니와는 다시 만난 적이 없고 그때 함께 나무를 하러 갔던 사촌 중에는 유명을 달리 한 이도 있지만, 기억만큼은 시간이 많이 흘러도 늘 따뜻하게 남았다.

양산(兩山) 마을
양산(兩山) 마을

1914년 행정구역을 편하면서 추동리(秋洞里), 백학리(白鶴里), 상산리(上山里), 중산리(中山里), 하산리(下山里)를 병합하면서 마을 앞 글자에서 추()자와 산()자를 따 와서 추산리(秋山里)라고 했다. 그중 상산 마을은 추산리의 제일 위쪽에 자리한 마을로 신라말에 한(), (), (), ()씨가 들어오면서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해진다. 마을 주민들은 상산을 산내(山內)라고도 부르는데 산골 안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당시 산내 지역은 상산, 외산(하산), 중산 지역을 모두 합해 부르는 이름이었다. 산내의 마을 이름은 두음법칙에 의해 주민들은 살래마을이라고도 불렀다. 지금은 상산(산내)과 중산을 합하여 행정리상 양산(兩山)이라고 한다.

양산 마을회관
양산 마을회관

마을은 한때 터가 좋다는 풍수지리설로 100여 호의 큰 마을을 이룬 적도 있다. 마을 뒷산 허리에 건립 연대가 확실하지 않은 산음사가 있었다고 구전된다. 중국 청나라 망명객인 양맥수가 이 고장에 옥녀탄금혈(玉女彈琴穴, 선녀(옥녀)가 장고 치고 거문도를 타는 지형이라는 뜻)과 옥녀배혈(玉女拜穴, 선녀(옥녀)가 엎드려 절하는 지형이라는 뜻)의 명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산세가 여인상을 하고 있다.

양산 마을의 다른 이름은 도선국사 마을이다.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는 통일신라 말기의 승려이다. 풍수지리의 대가로 전라남도 영암 구림동에서 월출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15세에 월출산 월암사로 출가해 순천 태안사에서 공부했다. 터만 남은 옥룡사에서 35년을 머물렀다. 양산 마을에는 도선국사와 관련된 일화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마을 입구 390년 된 느티나무
마을 입구 390년 된 느티나무

성공한 농촌테마마을 도선국사 마을

먼 산에서 산비둘기가 우는 여름 한낮, 도선국사 마을을 찾았다. 양산마을회관을 지나 300여 미터 오르니 주차장이 나왔다. 왼쪽에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농촌다움 보건사업의 하나로 20억을 지원받아 짓고 있는 농특산물 판매 매장이다. 지금은 약수터 인근에서 주말에만 잠깐씩 소규모로 장이 서는데,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마을 주민이 직접 거둔 농, 특산물을 팔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사업이다.

공사 중인 농특산물 판매 매장
공사 중인 농특산물 판매 매장

주차장 바로 앞에는 장독대 모양을 한 사또 약수가 있다. 예로부터 물맛이 좋아서 대대로 원님의 식수로 사용됐다. 마침 1.5L 생수병 12개에 물을 담고 있는 이상록(58) 씨를 만났다. 광양읍에 사는 그는 정수기를 사용하다가 그것도 결국은 수돗물이라는 생각에 음용수에 적당한 물을 찾다가 이곳을 발견했단다. 맛이 부드럽고 오래 두고 먹어도 침전물이 생기지 않아서 규칙적으로 물을 뜨러 다닌 지 10년이 넘었단다. 자녀들이 있을 때는 더 자주 왔었는데 지금은 부부만 사는 단출한 살림이라 한 달에 한 번가량 온다고 했다. 지역 주민들이 안심하고 마실 수 있게 광양시에서도 꾸준히 관리하고 있다. 중간에 대리석으로 한 적이 있었는데 물맛이 예전 같지 않아서 다시 부수고 지금과 같이 위생적이면서도 수도꼭지만 돌리면 물을 받을 수 있게 바꿨다.

사또 약수를 뜨고 있는 이상록씨
사또 약수를 뜨고 있는 이상록씨

파전에 막걸리, 그리고 직접 만든 손두부를 파는 용천 손두부가게를 지나 만남의 집으로 향했다. 엎드려 호미질을 하고 있는 마을 어르신을 보았다. 밭인가 하고 쳐다보니 빈집 마당이었다. 고랑도 이랑도 없는 평평한 땅에 드문드문 녹두가 자라고 있었다. 호미로 긁어야 풀이 죽을 것 아니냐며 웃는 할머니 표정이 인자하다. 그래. 이곳은 산 중의 산, 추산리지. 도선국사 마을이 되면서 일 년이면 억 단위가 넘게 소득을 올리는 주민이 있는 반면에 손바닥만 한 땅에도 작물을 심고 가꾸는 사람도 있다.

빈집 마당에서 풀을 매는 주민
빈집 마당에서 풀을 매는 주민

그럼 양산 마을은 언제부터 도선국사 마을이 되었을까? 농촌테마마을이라는 이름을 건 마을은 전국에 많지만 성공한 곳은 드물다. 잠시 반짝 시류를 타다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런데 이곳은 학생들 체험학습 철이면 하루에 500명이 넘는 학생이 찾기도 한다. 20년이 넘었으나 여전히 성황이다. 코로나로 힘들었던 지난 3년간에도 학교로 찾아가는 체험학습으로 인기를 끌었다.

하루에 버스가 몇 번 다니지도 않고, 장날이나 되어서 택시 몇 대가 오가는 게 전부인 오지 중의 오지 양산 마을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렇게 자리 잡게 되었을까? 체험 마을이라는 제도 자체가 없던 2002년에 진흥청 공모 사업에 도전하여 지금의 도선국사 마을을 만든 일등 공신은 당시 광양시농업기술센터에 근무하던 정옥자 팀장(20201231일자, 광양시 기술보급과장으로 퇴직)이다.

도선국사 마을 표지석과 안내판
도선국사 마을 표지석과 안내판

농촌진흥청에서 전국에서 아홉 개 지역을 선발하는 농촌 체험 마을 공모 사업에 직접 기획서를 써서 올리고 발표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정됐다. 당시 지원금은 2억이었다. 3천만원가량의 용역비를 주고 마을에 적당한 사업을 구상하는 게 일반적인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용역을 주면 책임은 덜 지고 일은 쉽게 할 수 있었으나, 그 돈을 차라리 마을 발전에 쓰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직접 발로 뛰었다. 아홉 개의 마을 중 용역을 주지 않은 곳은 광양시가 유일하다. 마을의 유래지를 살피고, 이 마을에 적당한 사업이 무엇일까 궁리했다. 퇴근 시간을 넘기는 날이 다반사였다. 1년에 100번이 넘게 이 마을로 출장 왔다. 동료 여직원 한 명은 밤에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려고 자신의 아이까지 데리고 오기도 했다.

정옥자 과장의 퇴임 축하 자리
정옥자 과장의 퇴임 축하 자리

희생과 봉사가 밑거름

마을 주민을 모아 놓고 설명회와 공청회를 거쳤다. 관이 주도적으로 해 나가면 다음 연도의 사업비 확보가 어렵고, 지속적인 사업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조심스러웠다. 결국엔 주민의 소득 창출로 이어져야 성공한다는 생각으로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방법을 찾고 운영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길이기에 주민들의 반대도 많았다. 리더 그룹을 선정하는 것도 어려웠다. 궁여지책으로 체험팀, 두부팀, 홍보팀 등으로 역할을 나누어 기술센터 직원 여섯 명과 마을 주민이 11로 팀을 꾸려서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마을 주민의 입장은 어떨까? 만남의 집에서 도선국사마을 운영위원장인 이은호(68) 씨를 만나 그 숨은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주민 설명회를 열어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개념도 잘 모르고 사람들 의식이 깨어 있지 않을 때였거든요. 진입 도로가 좁고 주차장도 없을 때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죠. 그때 김휘석 당시 농업기술센터 소장님이 도움도 많이 주고 격려했지요. 퇴직한 지 한참 되었지만 지금도 간혹 둘러보면서 마을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 줍니다.”

도선국사 마을 사무장이 근무하는 만남의 집
도선국사 마을 사무장이 근무하는 만남의 집

도선국사 마을이 첫 삽을 뜨던 2002년 여름에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옥룡천이 범람했다. 당시 이장이던 분은 수해 복구에 매달려야 했다. 마을 사람들의 관심도 시들해졌다. 결국 이은호 씨가 중책을 맡아 체험 마을 운영위원장을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앞을 봐도 산, 뒤를 봐도, 옆을 봐도 산인 우리 마을이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체험 마을 운영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원장이 되니 집사람의 반대도 심했습니다. 위원장 자리는 아무리 잘해도 좋은 소리 못 듣습니다. 여러 사람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지라 조금만 잘못해도 욕먹기가 쉽지요. 너도나도 손 놓으면 지금껏 해 온 게 아깝지 않느냐는 말로 주민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때 포기했더라면 지금도 없는 거죠.”

만남의 집에서 도선국사 마을을 설명하는 이은호 씨
만남의 집에서 도선국사 마을을 설명하는 이은호 씨

도로를 뚫고, 주차장을 만들고, 어떤 체험이 우리 마을에 적당한지 고민하는 사이 20년이 훌쩍 지났다. 위원장은 소득이 되는 일을 못 하게 했기에 그는 생업인 소 키우는 일에 종사하면서 이 일을 해냈다. 나중에 예약을 받고, 학생을 교육해 체험지로 안내하고 정산까지 하는 사무장이 생기면서 그도 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지금은 자신은 인절미 체험, 아들은 두부 요리 전문점을 하고 있다.

사람을 키워 소득을 창출하게 하는 일이 공무원으로서 가장 보람된 일이었다는 정옥자 과장은 그래도 이 마을 사람들이 참 대단합니다. 체험 영역을 다양화하려고 외부인도 선뜻 받아들여 기회를 줬습니다. 천연염색이나 도자기 체험이 그런 경우죠. 위원장은 이권 개입에 못 하게 막았기에 책임은 막중하지만 별 도움은 안 되는 자리인데도 지금껏 잘 끌고 왔습니다. 이은호 씨의 희생과 봉사가 밑거름이 돼 지금의 도선국사 마을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도선국사 마을은 , , 세 가지를 성공 목표로 정해 달려왔다. 차를 뺀 두 가지는 이뤘다. 이은호 씨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농촌이 참 어렵습니다. 중산이 큰 마을이 되었지만 반은 빈집이고, 반은 노인만 남은 1인 가구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20년 뒤에는 없어지는 마을이 태반입니다. 농민 수당, 직불금 등으로 혜택을 주기는 하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입니다. 기상 이변이 지속되면 식량 주권이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팍팍한 농촌 현실에서 도선국사 마을이 한 줄기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진 광양문화연구회 연구원 양선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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