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이균영백일장 입상작품_3
고등부 우수상┃수원나루고등학교 3-2 이하늘

각종 옷가지가 산더미처럼 높이 쌓여있다. 작아서 안 맞는 멜빵바지, 목 부분이 헤져 너덜거리는 빨간색 반팔 티. 온갖 여름옷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엄마는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대강 문지른 뒤 옷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엄마는 아련한 눈빛으로 큰 두 눈꺼풀을 끔뻑거렸다.
“이건 너가 초등학교 학예회 때 입은 거고, 이거는 너 생일 때 사준 옷…”
엄마의 손은 차마 옷들을 종량제 봉투로 옮겨 담지 못했다. 허공만을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그냥 버려, 다 작고 헤져서 못 입어”
엄마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또 다른 티셔츠를 집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대로는 밤을 지새도 정리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아 구석 쪽 모여 있는 옷 무더기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옷장에 파묻힌 탓일까. 퀴퀴한 먼지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간신히 코를 부여잡고 옷을 정리하고 있었을 때였다. 

나한테 이런 옷이 있었던가? 부직포같이 까끌까끌하지만, 상의 부분은 부드러운, 하나의 꽃봉오리 같은 원피스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허리가 잘록하고 치마 부분이 풍성한 걸로 보아 일상복은 아니었다. 나는 무엇인가 떠올라 고개를 들어 올리자 투명한 유리 선반에서 금빛 자태가 뿜어져 나왔다. 홀린 듯 열어본 선반 문 안쪽에는 트로피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제20회 발레 콩쿠르 경연대회 대상’ 그 옆에 적혀있는 엄마의 이름 석 자. 년 도를 보니 내가 태어나기 일 년 전쯤이다.
‘아, 내가 생겼기 때문에 엄마의 꿈이 무너진 거구나’
나는 가만히 트로피 표면을 만지작거렸다.
“딸, 오늘 학원비 결제하는 날이지? 주방 식탁 위에 카드 올려놨어. 그리고 붓이 많이 닳았더라. 아티스트가 꿈인 사람이 허문 거 쓰면 되겠어? 엄마가 새 붓 사 왔어”
나는 엄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엄마의 팔자주름이 저렇게 진했었나? 엄마의 얼굴에 피어난 온갖 주름들이 거미줄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거미줄에 걸려 아등바등하는 엄마가 차마 피우지 못한 꿈,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트로피를 응시했다.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 둥근 원을 만들고 왼쪽 다리는 하늘 위로 든 자세를 한 발레리나모형을 쳐다보니 표정이 자유로워 보였다. 

한 달에 몇백씩 드는 학원비를 대기 위해 투잡을 뛰지 않아도 되고 삼시세끼 차려줄 밥상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집안일에 구애받으며 몸 아픈 곳 하나 없는 몸을 가진 엄마를 상상하니 괜히 울컥해졌다. 엄마의 꿈은 어디로 증발했어? 엄마가 타온 트로피들은 아직 제빛을 내고 있는데 엄마한테는 왜 빛이 나지 않아? 처음으로 두 발이 이 땅에 붙어 있는 게 원망스러웠다. 엄마는 엄마의 꿈을 팔아 내 꿈을 메꾸어 주고 있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허구한 날 학원 가기 싫다고 꾀병이나 부렸는데.

바쁘게 손을 움직이던 엄마 앞에 발레리나 복을 살포시 갖다 놓았다. 잠시 흠칫했지만 곧이어 떨리는 손으로 치마 테두리 부분을 잡고 쓰다듬기 시작했다 엄마가 쓰다듬고 있는 치마 부분에는 엄마의 청춘이, 희망이, 젊음이 묻어있는 듯싶었다. 엄마의 소중한 꿈은 설거지하다 하수구에 빨려 들어가고 빨래하다 세제에 녹고 청소하다 걸레 뒷면에 닦이고 만 거야. 나는 인터넷을 찾아 경연대회 영상을 찾아보았다. 20회 수상자였던 엄마의 뒤로 벌써 40회가 되었지만, 엄마의 발레 영상의 조회 수가 가장 높았다. ‘백조의 호수’의 노래에 맞춰 살랑거리는 엄마의 몸짓이 꼭 바람에 흩날리는 핑크 율리 같았다. 영상 속 엄마의 표정은 처음 보는 자유로움이었고 주름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엄마의 놓쳐버린 꿈을 다시 재생시킬 수 있을까? 돌아오는 엄마의 생신에는 꿈을 선물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곱게 포장한 토슈즈가 든 선물상자와 정성스럽게 다린 발레복을 엄마께 내밀었다. 엄마는 쓴웃음을 뱉으며 손사래를 쳤지만 나는 엄마를 탈의실로 밀어 넣었다. 기껏해야 안방이지만. 헤어디자이너와 메이크업아티스트도 없지만 환복 한 엄마의 몸에서는 빛이 나고 있었다. 

“엄마 이상하지 않아?” “살이 불어서 꽉 끼는데” “전혀. 한 송이의 수국 같은데?”
나는 엄마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비록 지금은 관절이 녹슬어 다리가 예전처럼 하늘 높이 치솟지는 못하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그저 엄마의 잃어버린 꿈을 되찾은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어둑했던 새벽이 지나고 찾아온 햇살처럼, 겨울 내내 웅크려 있던 초록빛 식물들이 꽃씨를 터뜨린 것처럼. 엄마는 붉게 피어올랐다. 거실 선반 위에 얹어있는 대상 트로피의 발레리나모형이 저 환한 햇살을 받아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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