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룡면 추산리에도 ‘그랜마 모지스’ 할머니가 산다

진정으로 무언가를 꿈꾸는 사람에겐 바로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때입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딱 좋은 때이죠.”

미국의 화가 그랜마 모지스(Anna Mary Robertson Mosies, 1860-1961)의 말이다. 그녀는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76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01세까지 무려 1600여 점의 그림을 남겼다. 그중 250점은 100세가 넘어서 완성했다. 주로 뉴욕과 버지니아 농장에서 보냈던 전원생활의 소박한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평생 농장 일을 하며 열 명의 자녀를 키우는 일에 전념했던 그녀는 더 이상 자수를 놓을 수 없게 되자 여동생의 권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을 잔칫날이었을까. 무려 열한 명이 앉을 수 있는 사각형 모양의 식탁이 그림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정갈한 흰색 테이블보 위에는 개인 접시가 놓여 있다. 식탁 한쪽에는 칠면조 요리도 보인다. 한껏 꾸민 귀부인이 의자 한가운데 앉아서 담소 중이다. 그림의 구석에는 앞치마를 두른 채 오븐에 음식을 넣거나, 집게를 들고 고기를 굽는다. 식탁 밑에는 먹을 걸 얻으려는지 개 한 마리가 두리번거리고 있다. 그 위쪽 화면에는 알록달록 화려한 조각 테이블보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둘러앉은 여덟 명의 남녀가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눈다. 그랜마 모지스가 그린 <퀼팅 모임>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그녀의 그림은 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미국인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국가는 100세 생일이던 196197일을 모지스의 날로 선포하여 그 업적을 기렸으며, 그녀를 국민 화가라고 칭송했다.

옥룡면 추산리 외산(外山) 마을
옥룡면 추산리 외산(外山) 마을

옥룡면 추산리에도 모지스 할머니가 산다. 올해로 아흔두 살인 외산(外山) 마을의 김우심 할머니 이야기다. 그녀는 17세에 만난 남편과 73년을 살았다. 작년(2022) 297세로 남편이 사망하자, 그 이후에 처음으로 붓을 잡았다. 둘이 사는 세월에 너무 익숙해서였을까. 읍에 사는 자식들이 수시로 들락거리지만 좀 심심하더란다. 그래서 거실 한쪽에 있는 에어컨 겉싸개에 그림을 그린 게 시작이었다. 그걸 본 자식들이 물감과 붓, 스케치북 등 그림 도구를 사다 주었다. 그때부터 심심할 때면 그림을 그린다.

그녀의 그림에는 모지스 할머니처럼 농촌 풍경이 가득 담겨 있다. 노란 나무 수십 그루가 작은 호수를 감싸고 있고, 그 한가운데 오리 가족이 떠 있는 목가적인 그림도 있다. 징검돌이 놓인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 아낙, 함지박에 빨랫감을 인 다른 여인이 걸어온다. 소를 몰고 쟁기로 밭을 갈거나, 줄을 맞춰 허리 숙여 모내기하는 농부도 주인공이 된다. 벚꽃 화사한 길에 소달구지를 타고 가는 사람, 작은 개울에 산수유꽃이 흐드러진 풍경도 그렸다. 예전에 자신이 살았던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해서 그렸단다. 초록, 분홍, 노랑, 연두로 채색된 그림은 더 없이 따뜻하고 화사하며 정겹다. 그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꽃이다. 고흐의 해바라기를 연상하게 하는 그림도 여럿이다.

김우심 할머니댁
김우심 할머니댁

처음부터 할머니가 그림을 내게 보여 준 건 아니었다. 밤꽃이 하얗게 뒷산을 덮은 날, 그 동네에서 나고 자란 강미선(50) 씨를 따라 외산 마을의 김우심 할머니 집 마당에 들어섰다. 밭에서 캔 양파와 마늘이 마당 한쪽에서 노릇노릇 말라가고 있었다. 햇살이 강하지 않은 오늘 같은 날, 밭매러 가야 하는데 약속 때문에 못 갔다며 아쉬워했다. 이 동네 오래 살긴 했지만 특별히 할 말은 없다며 묻기도 전에 말했다. 순박하고 인자한 얼굴이었으나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빛이 역력했다. 아흔이 넘었다고는 믿어지지 않게 허리도 꼿꼿하고, 주름도 없었다. 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인 혼자 사는 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갈했다. 언뜻 보이는 부엌살림도 잘 정돈돼 있었다. 솜씨가 좋아서 큰엄마표 김치는 인기가 많았다며 옆에 있던 미선 씨가 거들었으나 경계는 쉬 풀리지 않았다.

마침 아주머니 한 분이 집으로 들어섰다. 동네 부녀회장 일을 29년째 하고 있는 허양순(71) 씨였다. 남편도 이장이라서 부부가 안팎으로 마을을 위해 봉사한다고 했다. 일곱 집에 조금씩 나누다 보니 양이 얼마 안 된다며 양파 한 뭉텅이를 가지고 온 터였다. 개수는 많지 않았지만 양파 하나가 어찌나 실한지 봉지를 가득 채웠다. 동네 인심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유전과 환경 중 무엇이 먼저일까? 인간의 발달 심리학적 관점에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만큼이나 해묵은 논쟁이다. 어렸을 때는 유전의 영향이 20~40%이지만, 어른이 되면 40~60%가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다고 알려졌다. 어릴 적 환경으로 잠재되어 있던 유전자가 성인이 돼 독립된 환경에 놓이면 고개를 드는 것이다. 옥룡의 모지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강력한 유전자의 힘을 발견했다. 김우심 할머니는 봉강면에 사는 아흔여섯의 화가 김두엽 할머니의 친동생이다. 여든셋에 그림을 시작해 어느덧 14년 차 화가로 600점의 그림을 그린 김두엽 할머니는 아들과 함께 전시회를 수십 차례 열었다. KBS <인간극장>에 나와 유명세를 탔다. <황금연못>을 비롯한 다수의 방송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김우심 할머니 이야기를 듣노라니 자매의 유전자 안에 화가의 싹이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가자, 할머니의 표정도 부드러워졌다. 숨겨뒀던 스케치북을 꺼내 와서 그림을 보여 주셨다. 원근법이나 구도 등의 이론을 따르지는 않았으나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처럼 뜯어볼수록 이야기가 새어 나올 듯한 그림이었다. 마음이 좀 열렸을까? 냉장고에서 마실 것도 꺼내 오고, 마루 끝에 놓여 있던 보따리에서 책자 몇 권도 가져왔다. 그 안에는 할머니의 또 다른 비밀이 숨어 있었다. 놀랍게도 2004년부터 써 오던 가계부였다. 그중 몇 권은 태웠다고 했다. “해마다 농협에 가서 가계부 두 권을 가져와서 한 권은 이 어메 드리고, 한 권은 내가 하요.” 옆에 있던 부녀회장이 말했다.

김우심 할머니가 쓴 가계부
김우심 할머니가 쓴 가계부

20년째 가계부를 쓰는 아흔둘의 할머니

위 칸에는 그날의 중요한 일을 짧게 메모식으로 적었다. ‘새벽에 나가서 고춧대 태웠다.’, ‘부녀회에서 조기 사서 나누었다. 마늘에 비료 했다.’, ‘밤에 비가 많이 왔다. 오전가지(오전까지) 오락가락했다. 지은이가 아들 낳다고 전화 왔다.’, ‘장 담갔다. 비료 요소 3포대, 복압(복합비료) 3포대 샀다.’, ‘오후에 자근(작은) 며느리가 생선 가져왔다.’, ‘옹구정 동생, 읍에 동생 왔다 갔다. 딸도 와서 점심 먹고 자근(작은) 며느리가 늦게 와서 시아버지 상처 난 데 치료해 주고 갔다.’, ‘오전 1040분쯤 (영감이) 하늘나라러() 갔다. 오후에 장내(장례)식장에 갔다. 자식들 모두 왔다.’ ‘길갓에 호박 심은 데 풀이 많아서 맷다.’ 가계부를 적은 아래 칸에는 수입과 지출이 알아보기 쉽게 정리되어 있었다. 맞춤법이 좀 틀리면 어떠랴? 또박또박 쓴 글은 그 자체가 할머니의 역사였다.

김우심 할머니의 가계부
김우심 할머니의 가계부

할머니는 호박이나 토란을 심거나, 비료와 거름을 내는 것도 일일이 적었다. 그래야 다음 해에 농사를 지을 때 도움이 된다고 했다. 마을 이야기나 듣고 싶어서 그 동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할머니를 찾아간 길이었는데 할머니의 그림과 가계부에서 오히려 더 크게 감동을 받았다. 점심 준비할 때가 되었다며 부녀회장이 일어섰다. 점심은 마을 경모당에서 모여서 먹는다. 많을 때는 열한 명, 적을 때는 다섯 명이 모인단다. 밥해주는 사람이 별도로 있어서 좋다고 했다.

외산 마을회관(경모정)
외산 마을회관(경모정)

인심 좋은 마을이지만 빈집이 늘어가, 젊은 인력 충원이 과제

경모당으로 향하는 옥룡의 모지스 할머니와 헤어져서 미선 씨와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빈집이 많았다. 터만 남거나 허물어져 가는 집도 여럿이었다. 말끔하게 단장한 집도 드문드문 있었으나 대다수가 주말 주택으로만 이용하기에 마을 사람과는 왕래가 없다고 했다. 머잖아 겪게 될 농촌의 현실이 아닐까 싶어서 마음이 씁쓸했다. 당산나무와 마을회관 옆에 있는 커다란 창고에 다다랐다. 개나리색 벽에는 알찬 소득 외산 새마을 작업장이라고 검은색 페인트로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농한기가 되면 모여서 가마니를 짜던 곳이라고 미선 씨가 설명해 주었다. 한때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왁자했을 터였다.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외산마을 우물
외산마을 우물

마을에는 사람이 산다. 마을도 사람처럼 흥망성쇠를 거듭한다. 외산 마을은 1500년경 정씨가 처음 들어와서 마을을 이루었다. 1912년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옥룡면 하산리(下山里), 백계리(白鷄里) 지역이었다. 그런데 아래 하()자가 좋지 않다고 여겨 외산(外山)으로 바꿨다. 옛날에는 놋그릇을 만드는 곳이 있어서 녹점골로도 불렀다. 옥룡사지 동백 숲에서부터 백운산 자연 휴양림까지 외산 마을이기에 면적은 넓지만 추산리에서는 가장 작은 마을이다. 202371일자 기준으로 56세대에 95명의 주민이 산다. 한 세대에 두 명이 채 되지 않는 셈이다. 그만큼 홀로 사는 노인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작은 마을이 띄엄띄엄 흩어져 있다.

외산 새마을 창고
외산 새마을 창고

발효 음식을 만들려고 외산 마을에 정착한 지 17년째가 되는 오정숙(55)에게 마을은 어떤 의미일까 물었다. “우리 마을은 정이 정말 많아요. 어른들이 좋아요. 우리 집 문고리에 누가 두었는지도 모를 호박이나 깻잎이 자주 걸려 있어요. 마을이 노령화되어 가는 건 좀 안타까워요. 마을이 발전하려면 새로운 인력이 필요하답니다. 주말 주택으로 이용하는 게 아니라 와서 거주하는 이가 있으면 좋겠어요.”

·사진 양선례 광양문화연구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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