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문화 산책-방승희 광양문화연구회 연구원

상운마을을 찾아가는 날, 상운(上雲)이라는 이름을 의식해서인지 자꾸만 눈길이 하늘로 향했다. 동화 속 마을처럼 하얀 구름이 드리워진 예쁜 마을이 나타나려나. 기대와 설렘을 안고 옥룡에 들어섰다. 필자의 마음에 부응하는 듯 백운산 자락 곳곳에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올랐다. 

“어르신들 마음이 포근해서 들어왔어요. 이곳에서 편안하고 안정된 노후를 보내려고요.” 마을을 거닐다 처음으로 만난 손장일(63세) 씨의 말이다. 광양시청에서 퇴직하여 상운마을을 제2의 삶터로 정했고 강아지 복남이와 중흥사까지 산책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 한다. 가족들 모두가 만족하시냐 물으니 곁에 있던 복남이가 컹컹 큰 목소리로 대신 대답을 해준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회관에 닿으니 또 다른 강아지가 필자를 맞았다. 서로 통성명을 해야겠기에 네 이름은 뭐냐 물었다. 인기척을 느끼고 나오신 어르신들이 가르쳐 준 강아지 이름은 ‘공샌’이었다. ‘샌’은 선비를 일컫는 말이 아닌가. 작은 강아지에게도 주인인 공씨 성을 붙여 존대하는 것 같았다. 

상운마을 전경
상운마을 전경

하늘만 보이는 동네
상운마을은 옥룡면 운평리에 속하며, 봉강으로 넘어가는 길을 사이에 두고 아랫마을은 하운이라 부른다. 상운의 본래 이름 뿌리인 굴물(堀勿)은 산골짜기라는 의미로 백운산 산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이란 뜻이다. 따라서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기 때문에 구름이나 안개가 자주 끼어서 운리(雲里)라고도 부른다.

한편 쑥붕어빵 가게가 있는 삼정지도 상운에 속한 자연마을이다. 이곳 삼정지에서 흥룡교로 가는 세 갈랫길 도로 진입에 옛 옥룡면사무소가 있었는데 그곳을 터서리라 부른다. 현재 면사무소의 위치는 상평으로 이전하였지만 옥룡의 중심이 된 운평리라는 이름은 상운과 상평의 이름을 따서 붙이게 된 것이다.

상운마을회관
상운마을회관

“이 더위에 누구요?” 회관 안에는 어르신들이 모여 앉아 무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방안에 계시던 어머니 몇 분도 빼꼼히 문을 열고 낯선 이를 맞아 주셨다. 동네 구경 왔다며 자랑거리 좀 들려 달라 부탁 드렸더니 어르신들 눈빛이 달라졌다. 그 중 동네 청년을 자청하신 어르신 이춘연 씨께서 벌떡 일어나 커다란 상패를 가져 오신다. 광양시 아름다운 마을가꾸기 발표회 ‘대상’이라는 큼직한 글씨가 박혀 있었다. 지금 이장이 해낸 업적이라며 5억이라는 큰 상금을 받아 마을 담을 예쁘게 단장 중이란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은 동네라 시야가 넓어 전망도 좋다며 김순용(89세) 어르신도 한 마디 하신다. 심지어 하늘만 보이는 날도 있단다. 상운이라는 동네 이름과 썩 어울리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과 대숲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겨울엔 아주 따뜻하다며 어머니들도 마을 자랑에 한마디 보태셨다. 앞 동네 상평보다 기온이 3도나 높아서 세상 살기 좋은 곳이라며 생긋 웃으신다. 무엇보다 아이들 학교 댕길 때 건너다닐 냇가나 언덕이 없어 마음이 편했단다. 한겨울에도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동네에 사셔서 그런지 미소마저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회관에서 만난 어르신들
회관에서 만난 어르신들

앞서가는 동네
“저것이 뭔지 아요?” 이정연(86세) 어르신이 가리킨 것은 회관 천정에 매달린 네모  반듯한 기기였다. 저게 뭐더라 이름을 생각하고 있는데 “빔 프로젝트라는 것이다요!” 조금 높아진 목소리였다. 얼른 알려주고 싶고, 빨리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역력했다. “우와!” 필자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시골에서 쓰임새가 있냐고 물었다. “있다마다요. 마을사람들 회의할 때도 다 모여 보는 거요. 저 하얀 화면 보이지요? 저기에 큼직하게 나와요.” 우문현답이라는 말처럼 어리석은 질문에 당연한 답변이라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런 기계는 있는 마을은 전국에서 유일하다고 하시니 동네 자랑에 방점을 찍나 했는데 무선방송도 있다며 말씀을 또 이어가신다. 회관에서 이장이 방송을 하면 집안에서 편히 들을 수 있고, 외출에서 돌아와 재생 버튼을 누르면 재방송도 들을 수 있다는 거였다. 마을 주민 다수인 어르신들을 위해 이장님께서 방방곡곡을 다녀 구입한 기기였다. 앞서가는 마을은 어떤 모습일까. 최신기계가 설치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부심 가득한 어르신들의 표정을 보며 필자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 이유다.
 

상운마을 변동하 이장님
상운마을 변동하 이장님

어른의 품격
다음날 또 찾은 회관엔 변동하 이장님께서 미리 와 기다리고 계셨다. 택시 운전을 하며 농사일과 마을 일까지 하시니 늘 바쁘다 하신다. “동네 주민들 다수가 노인들이라 무엇이든 어르신들한테 초점을 맞춰야 해요. 절도나 도난 방지를 위해 CCTV 7개를 설치했고요. 어두운 길목엔 안전을 위해 가로등도 23개나 달았어요. 귀가 어두운 어르신들이 많아 마을 일을 의논할 때는 직접 만나 상의합니다.” 지금도 소홀한 점이 많아 열심히 노력 중이라는 이장님 표정에서 마을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지금 상운마을엔 귀촌 8가구 포함 48호가 오순도순 살고 있다. 최근에 있었던 마을의 기쁜 소식은 두 가지란다. 가장 고령자인 어르신이 100세를 맞으셨고, 같은 해에 상운 출신 시청공무원 이혜숙 과장 승진 소식이었다. 또 하나의 축복은 아기의 탄생이다. 국제결혼으로 라오스에서 온 젊은 색시가 아들딸 쌍둥이를 낳아 작년 인구 102명이 되었다. 동화책에서만 볼 수 있다는 아이들 뛰노는 농촌 풍경을 상운마을에서는 눈앞에서 볼 수 있다.

상운마을은 옥룡면에서 농가 수가 많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경지면적은 옥룡 전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부자동네라고 어르신들이 힘주어 말씀하신다. 부(富)를 측정하는 나락 매상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50여 년 전 어르신 두 분의 노력으로 중흥사 위 자연수를 끌어 온 덕분에 물 걱정도 없는 동네다. “지금은 걱정이란 게 뭐 있겠어요. 젊은이들이 한 번 나가면 안 들어와서 걱정이지. 요즘 농촌 여건이 안 되니 이해는 하지만 집이 자꾸 비어가는 게 속상하지요.” 동네를 위해 큰일을 해내신 최고령 어르신 두 분의 안타까움이 당부로 이해되는 대목이다.   

요즘 농촌 문제를 논하자면 끝이 없다. 어느 마을이건 마찬가지다. 동네를 만들고 이끌어 오신 어르신들의 말씀 한마디, 마을 일을 책임지고 있는 지도자의 생각이 동네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다. 동네 어르신들 쌈짓돈 꺼내는 게 안쓰러워 이장세도 받지 않고 멋진 마을 만들기에만 골몰하는 이장님이 계시는 한, 불쑥 찾아간 외지인에게 고향의 앞날을 걱정하며 희망을 들려주는 어르신들이 계시는 한, 상운마을은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다는 걸 확신한다. 

중흥사
중흥사

역사가 있는 마을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필자는 마음이 분분할 때면 산사를 찾곤 한다. 대웅전 한 바퀴만 돌아도 평정심을 찾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상운 마을 뒤쪽에 위치한 중흥사는 필자가 아는 한 광양에서 가장 안성맞춤인 절이다. 구전에 의하면 신라 제 48대 경문왕 때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국보 제103호로 지정된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은 현재 국립 광주박물관에 있지만, 보물 제112호인 중흥산성 삼층석탑은 우아한 자태로 중흥사를 지키고 있다. 운이 좋으면 스님 한 분을 만나 사찰의 역사도 들을 수 있다. 험난하고 아픈 우리의 역사를 문화재로 들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될 것이다.

중흥사 도성스님
중흥사 도성스님

스님은 필자에게 ‘강희용’ 이름 석 자만 수첩에 적어주고 법명은 끝까지 생각나지 않는다며 가르쳐주지 않으셨다. 절 입구에서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또다시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왼쪽은 광양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산성인 중흥산성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편으로는 물멍하기 좋은 저수지가 보인다. 이곳이 원래 중흥사의 대웅전 터라고 하니 저수지가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저 바닥엔 무엇이 웅크리고 있을까.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물속을 헤엄쳐 들어가면? 역사 속 한 장면과 조우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해본다.

중흥산 뒷산 저수지
중흥산 뒷산 저수지

내 마음속보다 더 따뜻하게
저수지 뒤쪽 숲길엔 저수지로 흘러 들어오는 작은 계곡이 있다. 졸졸 흐르는 물길 따라 걷다보면 사방이 소나무와 편백나무로 둘러싸인 숲에 이른다. 들려오는 건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서걱서걱 나뭇잎 소리, 그리고 펄쩍 뛰는 개구리 숨소리뿐이다. 아늑하고 포근하다. 필자는 문득 상운마을의 시작은 이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노거수와 녹차와 대숲이 어우러져 마을을 싱싱한 빛으로 감싸는 동네, 사찰과 교회가 공존하며 마음을 나누는 동네, 멋진 카페가 두 곳이나 있어 차 한 잔의 여유와 낭만을 즐길 수 있는 동네, 구름이 뭉게뭉게 꽃잎 되어 하늘을 수놓는 동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어르신의 말씀 한 마디가 큰 울림으로 남는다.
“우리는 상운을 찾는 여러분들을 내 마음속보다 더 따뜻하게 맞이합니다” 

글·사진=방승희 광양문화연구회 연구원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