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이균영백일장 입상작품_5 ┃고등부 우수상┃김나경

식빵에 환한 햇살을 발라먹었다. 버석하게 마른 식빵은 익숙하리만치 입술에 감겼고 밤새 메마른 식도로 출입했다. 주스 한 모금도 없이 넘기는 아침은 너무 이른 새벽이라 새도 지저귀지 않았다. 건물 새로 수줍게 고개를 내미는 햇살을 보며, 그렇게 내 모의고사의 날이 밝았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하루는 참으로 비몽사몽 해 뱉어낸 날숨이 하품으로 변하기 십상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등교하던 학생들은 오늘만큼은 서로 떨어져 각기 길을 걸었다. 저마다의 손에는 영어 단어라던 지, 탐구 요점 정리라던 지, 긴 이름 붙은 종이를 들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흔한 가방 없이 오로지 삼색 볼펜 하나만 손에 쥐고 등굣길에 올랐다. 오르막길에는 우리 학교의 교목이라 알려진 은행나무가 햇살에 난반사해 샛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내 행선지의 끝은 교실이 아니었다. 교실 옆, 가끔 교사회의 때만 사용되는 상담실이었다. 그 안에 앉아 담임선생님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품에 서류 봉투를 안으신 선생님이 들어왔다. 1교시는 자신이 시험감독으로 들어가야 하니 잠시만 기다리라 하며 곧장 교실을 나가셨다. 그렇게 잠시만의 80분이 시작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나도 1교시 시험은 볼걸. 후회를 해도 이미 늦었다. 시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을 때, 내 손에는 시험지가 아닌 자퇴서가 쥐여져 있었다. 11년간 학생이었지만,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사유를 적는 건 80분은커녕 8분도 걸리지 않았다. 

빼곡히 찬 자퇴서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교실 가장자리를 무료하게 걸었다. 창문 너머로 아무도 없는 운동장이 보였다. 운동장은 체육시간마다 보았던 고목들로 한 면이 빼곡히 차 있었는데, 새삼스럽게 그 고목들이 모래바닥에 검게 그을린 그림자를 뉘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마치 커다란 햇살이 그림자에 의해 여러 갈래로 나뉘며 부서지는 것처럼 보였다. 참으로 눈부시다 싶어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저런 강한 햇살을 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지금 이 시간대면 두 눈을 교과서에 고정한 채 선생님의 말씀을 받아 적느라 고개를 들새도 없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간 고개를 얼마나 교과서에 박았는지 확인하는 시험에서 창밖을 보는 사치를 부리고 있었다. 사람은 여유로울 때 잡념에 빠진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절로 청승맞아졌다. 원래 이 시간대에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건지,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는 게 돌연 두려워져 생각이 많아진 건지. 사춘기를 벗어난 지 오래이건만, 당최 고등학생의 마음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곧 학생이 아니게 되니 소녀라 해야 할까. 

막 사색에 빠지기 무섭게 종소리가 울렸다. 80분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곧 선생님이 상담실로 들어오셨다. 미리 작성해 둔 자퇴서와 함께 학부모 동의서를 건넸다. 선생님은 콧잔등에 걸치고 있던 안경을 이마 위로 올리셨다. 미간 새 깊게 패인 주름을 씰룩이며 유심히 자퇴서를 들여다보셨다. 수고했다며 말을 붙이신 선생님은 내 품에 서류 뭉터기를 쥐어주셨다. 학교 밖 청소년 지원사업. 건조한 제목을 가진 서류를 들여다보며, 해당 사업을 안내 받았다는 확인서에 사인을 하고 나서야 상담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한낮의 교문은 주변을 둘러싼 온도마저 낯설기만 했다. 다들 시험을 치르느라 바빠 지금 이곳에는 학생이 없었다. 나는 조용히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상담실 창문 너머로 본 햇살은 여전히 짙었고, 고목의 그림자는 짙어지기만 했다. 백과 흑이 만난 경계를 걸으며 여러 갈래로 자랐거나 부서진 햇살을 바라봤다. 분명 하나의 태양으로부터 나왔을 텐데 이리저리 산개한 것이 신기했다. 나는 운동장에 새겨진 무늬를 따라 밟았다. 저 굵은 햇살은 분명 깨지기 싫은 겁쟁이일 테고, 가늘게 피어난 그림자는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게 무서운 소심한 것일 테다.

그러다 문득 여러 가지에서 뻗어져 나오다 홀로 뚝 떨어진 햇살이 보였다. 저 환한 햇살은 어쩌다가 홀로 뚝 떨어졌을까. 나는 그 햇살 위로 가 섰다. 두 발 가득 찬 햇살이 내 검은 정수리를 익혔다. 햇살은 놀랍게도 나와 딱 들어맞았다. 한참을 그 위에 서 있던 나는 걸음을 옮겼다. 아침에 밟았던 길을 운동화 밑창에 붙은 햇살과 함께 되새겼다.

나는 내일 식탁 위 버석한 식빵을 먹을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사과잼을 펴 발라 내일모레도, 글피도. 똑같이 식빵을 먹을 것이다. 어제와 비슷한 일상을 보낼 테니 학생이 아니게 됐다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나일 것이다. 매일 떠 있는 태양에서 삐져나온 저 환한 햇살처럼. 상담실에서 이고 나왔던 바위가 부서진, 그런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걸어가는 길에 은행나무가 보였다. 은행나무의 노란빛에 난반사 해 내 얼굴이 노란 햇살로 물들었다. 나는 은행나무의 껍질을 매만지다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걸어가는 행인 없이 텅 빈 내리막길에서, 나를 따라온 환한 햇살과 함께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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