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방승희 광양문화연구회 연구원

가끔 시골로 가는 마을버스를 탈 때가 있다. 승객 대부분은 어르신들인데, 창밖 풍경을 보며 가다보면 차안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저절로 귀에 들어온다. 농사일로 시작된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말로만 들었던 사랑방에 앉아 있는 느낌이다. 마을의 대소사며 이웃의 건강 이야기, 누구네 자식 승진 소식까지 주거니 받거니 쉼 없이 이어진다. 분명 타는 곳이 달랐는데 모두 한 동네 사는 것처럼 호응하고 소통한다. 그러다 “잘 가쇼” 한 마디 툭 던지면 이야기가 끝이 난다. 내릴 때가 된 것이다. 이번 마을 정거장은 하운마을이다. 

하운(下雲) 마을


행복? 몰라!
하운마을은 옥룡면 소재지가 있는 운평리 4개 마을(상평, 하평, 상운, 하운) 중 하나이다. 마을 이름의 원뿌리는 굴물(堀勿)이며, 그 의미는 산골짜기라고 한다. 산으로 둘러싸여 구름이나 안개가 자꾸 끼여 운리(雲里)라고도 하였는데, 1912년 이전 웃굴몰 상운마을과 분리되면서 아랫굴몰 즉 하운마을이라 부르게 됐다. 
마을이 자리 잡은 곳은 봉강면 부저리로 넘어가는 가무고개 아래다. 동네 입구 하운마을 표지석을 지나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남쪽 방향엔 바람막이 같은 나지막한 남산이 있다. 마을 회관에서 바라보면 정면으로 보이는 동네가 면소재지 상평마을이다.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에 하운마을 회관을 찾았다. 회관 옆에 놓인 평상에 어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다. 알록달록 꽃무늬 옷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밀고 오신 유모차와 함께 땡볕을 피하고 계신 듯했다. 동네 어귀부터 사람을 볼 수 없어 아쉬워하던 터라 무척이나 반가웠다. 인사를 드리고 뭘 하시냐 물었더니 그냥 앉아 계신단다. 우리는 마주보고 하하 호호 웃었다. 요즘 하시는 일은요? 했더니 아무 일도 안 하신단다. 허리가 아파서 할 수가 없단다. 어디가 고향이냐 또 물었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디서 시집 오셨냐고 다시 여쭈었다. “저어그 우게” 하시며 손가락으로 서쪽을 가리켰다. “아, 저어그요?” 필자도 같은 방향을 가리키며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연세를 물으니 “여든 서인가, 너인가, 잘 모리것네” 하시며 샐쭉 웃으신다. 어린애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머니는 83세 이도순 어르신이다. 자식들은 객지로 다 떠나 혼자 살고 계시지만 물 맑고 공기 좋은 동네에서 사니 세상 좋다 하신다. 

하운마을 회관
하운마을 회관

오랜 세월 사시는 동안 가장 힘든 순간은 언제였을까. 어르신의 눈동자가 커지며 목소리도 갑자기 높아졌다. “애기 업고 산에 나무 심으러 다녔제. 돈을 못 내믄 일을 혔어. 애기 봐 줄 사람이 없응게. 동네 사람 다 다녔어” 30여분 얘기 나누는 동안 가장 긴 답변을 해주셨다. 그만큼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는 것을 말씀으로 증명한 셈이다. 그 당시 울력이나 세금 관련 노동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뿐이다. “그러면 저어기 백운산에 엄니가 심은 나무가 많겠네?” 분위기 전환을 위해 대뜸 물었더니 활짝 웃으며 답하신다. “그러것제!” 이런 이야기를 자식들에게 해 본 적 있느냐 물었더니 고개를 저으셨다. 문득 어르신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궁금해졌다. “행복? 몰라!” 너무 짧은 답변에 당황하는 필자를 두고 어르신이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유모차에 의지하며 한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치마에 그려진 꽃들도 한들 한들 따라 걸었다. 저만큼 어르신 세 분이 보였다. “다 좋았어!” 유모차를 밀며 함께 걷는 필자에게 어르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백꽃이 툭! 무심한 듯 또렷한 어르신의 목소리였다.  
 
이웃 보고 천 냥 줬어!
“집 얘기 나옹께 진짜 울컥 허요” 허리도 꼿꼿하고 목소리도 우렁찬 나순애(78세) 어머니는 금방이라도 울음보를 터트릴 것 같았다. “시집을 왔는디 집이 없어서 상평 봇도랑에 오두막집을 지어 살았소. 도랑가다 보니 어쩌 것소. 구들장에 물이 들어오더라 말이요. 그렁께 집이 얼음 속이 되더라요. 그 속에서 애들 셋을 낳았소. 여름에는 비만 오면 떠내려갈까 걱정을 얼마나 했는지 모르요. 집 없는 설움, 하천에서 사는 설움을 어찌 다 말로 하것소” 쉼 없이 쏟아내는 말씀을 들으면서 필자는 안타까움이 담긴 한숨만 수십 번도 더 넘게 쉬어야 했다. 

하운마을 언니들 조희남, 김복남, 이도순 씨
하운마을 언니들 조희남, 김복남, 이도순 씨

도랑가 집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지금 살고 계신 세 번째 집을 짓기까지의 과정은 드라마 한 편을 만들어도 부족할 듯했다. 어르신 스스로도 배움이 있었다면 책 몇 권을 썼을 것이라 했다. 돈이 없으니 사촌시숙의 도움을 받아 집을 지었는데 그 돈이 요즘 일수 비슷한 빚이었다. 시숙이 빚을 얻어 다시 빌려준 돈이었다. 이 빚의 특징은 장날이면 꼬박꼬박 갚아야 하는 것인데, 시숙에게 돈을 주면 제 날짜에 전달이 되지 않은 것이다. 먹고 사느라 힘들었던 시절, 시숙어른께서 일하느라 장날을 잊어버린 게 문제였다. 날짜 맞춰 돈을 주었으니 어련히 잘 갚고 있으려니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참 시간이 흘러 알았단다. 제때 빚을 갚지 못하니 이자가 붙어 빚이 산더미처럼 늘었다는 것을. 3년이면 갚을 돈을 10년을 끌었다는 거였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하소연하듯 들려주는 어르신에게 필자가 할 수 있는 건 도돌이표 같은 한숨소리 뿐이었다. 

이어진 어르신의 삶 이야기는 한 시간 동안 계속 됐다. 그렇다면 이토록 슬프고 한스러운 삶을 지금까지 어떻게 지탱하고 사셨을까? “한마디에 풀었제. 미안하다고 해서” 어떤 일이든 다 그랬다고 했다. 그래서 동네 언니들과 다 친하다며 모처럼 활짝 웃었다. 옆에 계신 동네 언니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반란사건 때 저어그 까목재(가무고개)서 사람이 많이 죽었어. 지금은 큰 길이 나서 덜 무섭지만 그래도 밤에는 싫어” 동네 언니 중 한 분인 조희남 어르신의 말씀이다. 우리의 아픈 역사 여순사건의 비극이 하운마을에서도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괜찮어. 회관 지어서 좋고 불편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 우리는 이웃 간에 참 행복혀. 얼마나 좋으면 진상우체국장이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것능가” 이번에는 동네 언니 김복남 어르신이 한마디 보태셨다. 이때 네 명 중 막내 나순애 동생이 마침표 같은 말로 마무리를 하셨다. “우리는 이웃 보고 천 냥 줬어!” 

이용재 이장
이용재 이장

합시다? 그럽시다!
이용재(75세) 이장을 기다리는 동안 할아버지 한 분이 수레를 끌고 지나가셨다. 인사를 드려도 못 들으셨는지 터벅터벅 저만큼 멀어졌다. 이 더위에 나무를 어디에 쓰려고 하지? 혼잣말처럼 읊조린 의문은 금방 풀렸다. 이웃 할머니의 부탁을 받아 도와드리는 중이라 했다. 너도나도 모두 노인이라 기운은 부족하지만 그나마 조금이라도 나은 분이 도와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우리 동네는 순해요” 이용재 이장은 문장 하나로 동네를 정의했다. 이어 동네 상황에 대한 설명도 어르신들이 합창하듯 하신 말씀과 차이가 없었다. 총 33가구 85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다른 동네와 큰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빈집이 나오면 곧 새 주인이 나타난다는 것, 그래서 빈집도 없고 인구수 변동도 가끔 있다는 것이었다. 동네가 정말 좋아서 그런 것 아니냐는 필자의 물음에 땅값이 적당해서 그렇다고 현실적인 답을 주셨다. 참 솔직담백한 이장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동네는 해가 바로 뜹니다” 처음 들었을 땐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이른 아침 하운마을에 가보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것이다. 무엇 하나 거칠 것 없는 넓은 들판에 붉은 해가 둥실 떠오른다고 생각해보시라. 어떤 해라도 우물쭈물 해찰을 한다거나 망설일 수가 없다. 큰 태풍이 와도 끄떡없단다. 마을 뒤쪽 고개와 옆에 있는 산들이 막아주니까. 해넘이도 정확하다는 말씀 안에는 마을 일을 맡고 있는 책임자로서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마을 길 포장도 마쳤고, 농로 정리도 끝나가고, 회관도 새로 지었으니 크게 바라는 것도, 부탁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다만 마을 숙원사업만 잘 해주길 바란다는 당부를 하셨다. 마지막 말씀은 역시나 동네 자랑이었다. “우리 동네는 단합을 잘 합니다. 합시다? 하면 그럽시다! 합니다” 필자는 하운마을에서 단합의 행동지침 하나를 배웠다.

취재를 마치고 마을을 한 바퀴 돌다가 어르신들이 말씀하신 우체국장 댁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멀리 한눈에 들어온 하운마을의 풍경을 보며 왜 이곳으로 이주하셨는지 이해가 됐다. 언덕을 올라가 가목재(가무고개)에 이르러 다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초록바다처럼 펼쳐진 하운들판에 백로와 왜가리가 춤을 추듯 날아가고 있었다. 너울너울 오르락내리락 앞서거니 뒤서거니 둘 사이엔 어떤 경쟁도 다툼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날 뿐이다. 원래 큰 깨달음엔 대단한 수식어가 붙지 않는다. 미사여구는 더더욱 볼 수 없다. 오랜 세월, 인고의 삶을 살아오신 어르신들의 말씀 한 마디가 귀하고 소중한 이유다. 

글·사진=방승희 광양문화연구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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