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한여름 쉴 새 없이 물가에서 북적거리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떠나갔을까?

내 곁에는 다만 말없이 흐르는 물과 그 곁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들이 정물인 듯 적요하다. 그것이 그들의 본래의 모습임에도 쓸쓸함이 묻어나는 것은 지난 여름날의 소음들이 극심했던 탓일 것이다.

뜨거운 날씨와 마치 전쟁하듯 치러낸 여름이었다.

무더위를 피해 자연의 품에 안긴 사람들은 너나없이 물속에서 왁자지껄 소리치며 헤어날 줄 몰랐고 그 일탈의 즐거움이 때때로 자연에서의 소음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물 위의 평상에서 줄곧 누워있거나 종일 멍하니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기만 했던 사람들, 모두들 마음속에 무겁게 쌓았던 것들을 제대로 털어버리고 갔는지.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 인간은 힘든 시간을 피해 철새들처럼 여기저기 떠돌다 세상에서 멀어져가는 존재가 아닐까?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 또 다른 날이 내 앞에 덜컥 다가섬을 느낀다.

그럴 때마다 무더위에 지치고 느슨해졌던 마음이 곧게 서고 새로운 다짐이 생겨나곤 한다. 피부에 와 닿는 계절의 변화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삶의 지표가 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러날 이어지던 비가 그치고 내리는 햇살에 나뭇잎들은 씻은 듯 싱그럽다.

문득 저들이 야단스럽게 누렸던 그 물속에 들어가고 싶어진다. 바지를 걷고 물을 헤집으며 물 가운데에 있는 큰 바위에 기대어 선다.

떼를 지어 물살을 타는 송사리, 피리 같은 물고기들도 이제 안정을 찾은 듯 여유롭다.

두 다리에 조용히 부딪히면서 생겨나는 작은 너울들이 몸에 달라붙기라도 하듯 연신 다가와 다리를 간지럽힌다.

물의 차가운 촉감은 다리를 통해 심장을 거쳐 머리끝으로 연결된 회로에 새로운 전류가 흐르듯 줄곳 과부하에 시달리던 내 안의 온도를 차츰 낮추어준다.

뿐만 아니라 머리와 마음속에 무겁게 자리하던 것들을 일순간에 얽매였던 나를 자유롭게 놓아준다.

그때 많은 사람의 즐거움이 넘쳐 무심코 내지르는 고성을 이해할 듯도 하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어느 날 눈부시게 빛나거나 맑아지고 뜨거움이 식은 마음은 가벼워지고 고요해지고, 보이는 모든 것들이 긍정적인 것들로 채워지는 것, 그것이 마음에 닿아있는 평화란 의미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때마침 건너편 산속에서 이웃집 진수할아버지의 예초기 소리가 산촌의 고요를 깬다.

산비탈을 휘저으며 울리는 기계 소리는 긴 여름을 잠재우려는 속삭임처럼 들린다.

소리는 점차 내밀한 고요를 더 깊어지게 하듯 먼 산으로 겹겹이 퍼져간다.

칼날이 움직일 때마다 풀과 나무들은 강하게 때로는 힘겹게 부딪히며 소리로 저항한다.

칡넝쿨로 둘러싸인 나무 사이에는 벌써 씨알이 굵어진 밤송이들이 제각각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가지를 늘어뜨린 밤송이들은 저마다 떨어질 자리를 내려다보며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무더위와 씨름하는 가운데에서도 밤은 씨앗을 키웠고 나무들은 힘차게 자라 올랐다. 유난히 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때맞추어 적당한 비가 내렸고 나무와 풀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산과 들판을 휘저으며 저들의 세력을 넓혀나갔다.

비탈의 웃자란 나무를 잘라내고 무성한 풀을 깎아내면 밤이 떨어질 자리가 반듯하게 마련되었고 산은 점차 거추장스런 옷을 벗어버린 깔끔해진 모습을 드러내었다.

풀을 벤다는 것은 지나치게 웃자란 나무들이나 넝쿨들을 솎아내고 나무들이 자유롭게 커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지만 가을을 부르는 정겨운 소리이기도 하다. 이제 그곳으로 가을이 곧 다가올 것이다. 진정한 가을이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준비하는 자를 향해 달려오는 듯하다.

웃자람이란 사전적 의미는 나무나 풀이 일조량이나 영양소 과다 또는 부족으로 쓸데없이 길고 연약하게 자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틀 속에 갇혀 한쪽은 결핍으로 병들어 가는데도 성한 다른 한 쪽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도 모르게 웃자라있는 생각과 행동 때문에 불편해하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잘 다듬어진 비탈에 익은 밤송이들이 떨어져 편안하게 밤을 수확할 수 있듯 내가 달라짐으로 인해 더 편하게 세상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기꺼이 웃자란 생각들을 버리고 싶다.

자연에게도 사람에게도 가을이란 긴 자람의 시간을 멈추는 계절이기도 하지만, 여름날의 웃자람을 베어내어 새로워질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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