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원

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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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초계최씨 13세손(중시조)으로 부 한영(漢榮)공과 모 청주한씨의 사이에서 백운산과 북두성의 정기를 타고났다 해 휘는 山斗며 자는 景仰 시호는 文節 호는 新齋다. 1483년 4월 10일 광양 봉강면 부저리 월곡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영인 이천서씨와의 사이에 2남(어모장군 병길. 사헌부 장령 정길) 1여(훈련원 첨정 순천인 朴以良의 처)를 두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6살에 서당에 나가 공부를 했고 8세때에 詠牛頭(영우두) 詠鳥(영조)와 같은 詩를 지었으며 10세 때에는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세인을 놀라게 해 광양현감이 문방사우를 보내 치하했다. 15세 때는 공부를 독실히 할 뜻을 품고 ‘주자강목’ 80권을 가지고 옥룡면 동곡 백류동 석굴에 들어가 3년에 걸쳐 이를 통독을 하고 나왔다. 이때 석굴암 벽에다 ‘백운동 학사대’란 글을 크게 새겼는데 5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획이 뚜렷이 남아 있다. 

옛날 학사대
옛날 학사대

17세 때에 점재필 김종직, 한훤당 김굉필 두 선생을 사숙해 도학에 정진하니 門路가 열려 학문이 더욱 깊고 포부가 더욱 원대했다. 18세 때인 1500년에는 당시 사림의 영수로 추앙을 받아오던 한훤당 김굉필 선생이 무오사화로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됐다가 그해 5월에 순천으로 이배돼 오자 평소 사숙해오던 선생을 적소로 찾아가 뵙고 직접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501년에는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상경해 그 제자들인 조광조·김정·김안국·김제·김구·한충·김정국·박세희 등으로 도의지교을 맺어 도학을 강구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일러 ‘낙중군자회’라 했다. 22세 때인 1504(갑자)년 사마시에 ‘강목부(綱目賦)’와 ‘백양대시(柏梁臺詩)’로 장원을 했다. 이해 10월 갑자사화로 한훤당 김 선생이 순천에서 서울로 압송돼 효수(梟首)당했다. 스승의 참혹한 죽음을 목도한 선생은 연산조의 폭정을 피해 승주군 송광면 천자암에 9년 동안을 도학궁리에 정진했다. 31세 때인 1513(계유. 중종8)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이듬해 홍문관 正字로 벼슬길에 나서 著作에 승진됐다. 이어 33세 때에는 훙문관 박사가 되었고 34세에는 홍문관 수찬 지제교 겸 경연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에 올랐으며 35세 때는 사간원 정언 겸 춘추관 기사관을 역임하였했다. 

36세 때는 不次(불차)로 사헌부 지평에 擢用(탁용)되니 차례를 뛰어넘어 승직(昇職)한 것을 미안히 여겨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을 얻지 못했다. 이어 홍문관 교리 겸 경연시독간, 사간원 헌납 의정부 검상, 예조정랑, 이조정랑겸 성균관직강 등 조정 요직을 두루 역임했고 또 이해에 중종께서 특별히 ‘一人有慶寶命維新’이라 새긴 玉笏을 하사하니 은영(恩榮)이 넘치었다. 그리고 이해 11월에 승정원에서 성리대전을 講할 만한 사람 26인을 뽑는데 선생이 그가운데 들었으며 이로부터 호당(湖堂)에 들어 더욱 학문에 전념했다. 37세 때인 1519년(기묘.중종14) 9월에 사헌부 장령에 승직되고 이어 11월에 광흥창(廣興倉) 守를 거쳐 의정부 사인겸 춘추관 편수관에 올랐다. 그러나 이해 11월 의정부 사인으로서 홍경주·남곤·심정 등 훈구세력이 일으킨 기묘사화의 화를 입고 삭탈관직 돼 전남 동복현에 유배됐다.

이후 선생은 14년 동안을 적거한 끝에 51세 때인 1533년 10월에야 해배가 되었으니 당시 찬축(竄逐) 당했던 기묘제현들 가운데서도 가장 길게 귀양살이를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25년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로 벼슬 5년에 14년 적거의 불우 그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적소에서도 愛國憂道의 일념으로 講堂을 열고 도학을 講하며 후진을 양성해 하서 김인후, 미암 유희춘 등과 같은 거유을 배출함으로서 호남도학을 크게 일으켰다. 1536년(중종31. 병신) 4월에 유배에서 풀려난 지 3년을 다 넘기지 못하고 재기를 못 한 채 세상을 버리니 향년 54세였다. 

현재 학사대
현재 학사대

특히 선생은 조정에 있는 동안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의정부, 이조, 예조 등 정부주요 부서의 핵심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또 지제교와 경연(검토관, 시독관, 시강관) 춘추관(가사관편수관)의 여러 직임을 겸직하면서 항상 최측근에서 임금을 요순과 같은 성군의 길로 인도하고 도학적 지치를 실현해 내는 일을 자기책임으로 여겨 진충갈력(盡忠竭力) 했다. 그러나 기묘년 사화로 그 국정 전반을 섭렵하며 쌓아온 경륜을 다 펼치지 못한 채 찬출(竄黜)되고 말았으니 실로 애석한 일이다. 선생은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당시 조광조 선생 등 사림들과 함께 경연의 강석(講席)을 주도해 기준, 박세희, 양팽손 선생과 더불어 四學士로 불러 졌으며, 또 문장이 특출해 명망이 높아 당시 윤구, 유성춘 선생과 더불어 호남 삼걸로 기림을 받았다.

선조 11년(1578) 광양현감 정숙남 공이 본 고을 향현인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광양봉양사를 세우고 선조 24(1591)에는 생전에 조정에서 종계변옥을 위해 힘쓴 공적으로 광국원종공신 3등에 책록됐다. 현종 9년(1668)에는 전라도 유림들이 선생의 적소인 동복 도원서원을 세우고 선생을 주벽으로 해 석천 임억령, 한강 정구, 우산 안방준 등 사현을 배향했다. 그리고 숙종14년(1688)에는 임금께서 賜額을 내리고 사현을 치제 했다. 고종 13년(1876)에는 노사 기정진 선생이 중심이 돼 전남 유림들이 임금께 선생에게 작시(爵諡)를 내리기를 청하기 위해 회동했으나 그해에 흉년이 크게 들에 이를 중지하고 말았다. 그 이후 1923년 다시 儒論이 크게 일어 대동사문회에서 금릉위 박영효, 전판서 홍순형, 전부제학 정만조 등 전국의 유림대표들과 전남 유림 수 천인이 모인 가운데 선생께 ‘문절선생’이라는 私諡를 奉呈했다. 그 사시안(賜諡案)에 일렀기를 “점재필 한훤당 양 선생께 사숙하고 정암조 선생으로 더불어 우의가 두터웠으니 그 연원이 단적(端的)하고 학문이 순수해 사림의 사표가 된다. 이를 ’文‘이라 이른다. 또한 기묘사화로 인해 동복현에 유배돼 무릇 15년 간을 적거하면서 愛君憂道의 시를 읊조리다 끝내 졸했다. 이를 ’節’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문절 선생’ 이라 한다”했다. 선생의 문집으로 新齋集이 있다. 광양고문서연구회 희양문헌집 수강생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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