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시대로의 시간여행

내천마을 최고령 94세 정용표 어른
내천마을 최고령 94세 정용표 어른

내천의 역사 정용표 어른

경로당에서 마을의 역사이자 최고령자인 94세 정용표 어른을 만나 삼한시대 광양의 중심지였다는 내천현성 이야기를 요청했다. 정용표 어른은 구체적인 장소를 짚어가며 열정적으로 이야기 해 주었다. 마을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청년처럼 넘쳐났다. 어른의 이야기를 들으며 구전되는 이야기도 지역의 역사문화다라는 생각이 깊어졌다. 정용표 어른은 1960~70년대에 죽천리 산림계장을 맡아 밤 산과 단감단지를 조성해서 농가소득을 높이는데 앞장선 분이다. 죽천리 산림계 등 광양지역의 70개 산림계는 나중에 광양산림조합으로 발전했다.

삼한시대로의 시간여행

광양의 구석기 시대는 기원전 10만 년 전에 시작해서, 기원전 1만 년 전의 신석기 시대와 기원전 1500년 전의 청동기 시대를 거쳐, 기원전 300년 전의 철기시대를 맞이한다. 삼한시대 시작은 철기시대와 비슷한 기원전 2세기로 본다. 한강 유역 북쪽에는 고구려, 부여, 동예, 옥저가 자리했고 남쪽에는 마한, 변한, 진한이 자리했다. 삼한인 마한, 변한, 진한은 각각 54, 12, 12개의 작은 부족국가로 이루어진 부족연맹체였다. 삼한시대의 특징은 철기 사용과 함께 벼농사가 본격화 되어 수리시설이 발달했다. 또 누에치기와 모시 삼베옷을 만들고 덩이쇠라는 철 화폐를 사용하기도 했다.

광양읍 도월리 철기제작 거푸집과 가야 그릇
광양읍 도월리 철기제작 거푸집과 가야 그릇

광양은 일반적으로 마한에 속한 것으로알려져 왔지만, 가장 빨리 철기를 제작한 변한과 변한의 맹주로 빠르게 자리 잡은 가야에 속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특히 가야가 세력이 좋은 기원전 100년에서 기원후 300년 사이에는 광양이 가야의 세력권에 들었을 것으로 본다. 이를 뒷받침 하듯 2008년 철도 광양역을 옮기면서 조사한 도월리 유적에서 철기유물과 가야시대 유물이 많이 나왔다. 도월리 철방 유적에서 철기제작에 쓰인 토제거푸집과 철 찌꺼기, 철 도끼조각, 송풍관(용광로나 야금로에 온도를 높이기 위해 바람을 넣어 주는 풀무질 관)조각이 나왔다. 생활유적에서는 300~500년 경 가야의 세련된 그릇들이 다량으로 나왔다.

백제 근초고왕은 369년 광양을, 370년엔 낙동강 유역까지 가야를 정복했는데, 이후 광양은 점차 백제의 세력권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500년 이후 삼국시대 광양에선 백제유적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백제유적이 마로산성이다.

내천마을
내천마을

내천현성이 광양의 중심이었다고?

1983년에 발간한 광양군지 역사편을 보면 옥룡면 내천과 진상면 비촌에 변한의 성터 유적이 있다고 나온다. 1956년 발간된 전라남도사를 인용한 글이다. 또 중마동에 가야산이 가야국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고 쓰여 있다. 나아가 당시의 광양군지 마을지편에는 삼한시대에 내천현성이 광양의 중심지였다는 설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골안’ ‘옥터거리같은 지명이 있고, 둘째, 옥룡면 선동에 살던 유명한 풍수지리가인 양맥수가 마방산하천인가거지馬房山下千人可居地라 했다는 이야기, 셋째, 향교가 있었다는 이야기와 실제로 마을 곳곳에서 오래된 기와 조각과 돌이 나왔다는 것 세 가지다. 여기에 더해 내천 지신(地神)과 광양읍 지신(地神)간에 중심지 다툼으로 불화가 생겨서 내천사람과 광양사람이 결혼하면 행복하지 못하다는 미신까지 생겨났다.

내천현성 이야기 지도
내천현성 이야기 지도

내천현성 이야기 지도

내천현성 이야기 지도는 정용표 어른의 이야기와 마을에 전해 온 지명을 근거로 만든 지도이다. 옛날엔 동곡에서 내려오는 동천의 물과 죽림천 물이 죽림교에서 만났다고 한다. 이 물길은 도로를 따라서 옥룡북초등학교 동쪽 담장을 지나 추동교 쪽으로 흘렀다고 한다. 내천과 개현이 한 마을 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죽림마을의 여러 지명들이 내천현성과 관련되고 있다. 그래서 내천현성 이야기 지도의 범위는 두 마을을 포함한 지도이다.

정용표 어른은 동헌터를 회관에서 남서쪽으로 50미터 아래 자리한 당신 집 주변으로 짚었다. 집터에서 오래된 기와조각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회관 뒤편 빨래터에는 상정막이라는 경비초소가 자리했고, 죽림교엔 길목을 지키는 병사들이 주둔한 중군터가 있었다고 한다. 동헌 서편 언덕인 서재등에 서재가 있었고, 동쪽 마방산 아래인 현 백운주조 뒤편 언덕에 서당이 있었다. 추동교 바로 아래에 감옥이 있어서 옥터거리라 불렀다. 추동교 바로 위를 골목끝이라 하고, 추동교에서 200여 미터 위 움푹 꺼진 곳에 웃문터가 있었다고 한다. 말에서 내려 걸어야 하는 하마터는 서울대 연습림 입구였다고 하는데 향교 자리는 특정하지 못했다.

이외에도 죽림마을 북쪽 가는골 입구를 당골이라 하는데, 점을 칠 때 쓰는 쇠붙이가 나온 점터골도 그 옆이다. 삼한시대에 하늘에 제사를 모시는 신당 즉 소도가 있던 곳이라 하겠다. 또한 죽림의 남쪽이자 내천의 동쪽에 자리한 마방산 아래 마방평은 말을 먹이고 재우는 말 주막이 있던 곳이다.

동헌터인 정용표 어른 집
동헌터인 정용표 어른 집

마방산 마방길

마방은 지금의 철도역과 버스터미널 같은 곳이다. 내천현 마방은 삼한시대에 하동의 중심지인 악양, 순천의 중심지인 낙안, 그리고 구례 남원으로 통하는 길목에 자리 잡았다. 아래의 시는 당시에 온갖 물자를 지고 내천현 마방길을 오르내린 말 이야기를 쓴 것이다.

마방길
                      민점기

도월리 철방에 막대기 모양 덩이쇠를 벗어주고 
솜씨 좋게 나온 칼, 도끼, 화살촉을 짊어졌다
두 동무는 염포에서 천일염을 등에 올렸고
다른 두 동무는 낙안에서
식량과 옷감을 지고 왔다
내천현 마방산 아래 말 주막에 들어서니
마방 주인이 마른 풀과 귀리를 듬뿍 내주었다
늦여름 백운산 물과 바람이 상큼하고 달달해
푸두둑 갈기 흔들어 절은 짠 내를 털어냈다
십 년 동안 잘록한 허리 엮은 덩이쇠 지고서
주인님 곁에 바투 붙어 동무들을 이끌었다
내일도 해가 뜨기 전에 마방길에 오른다
곰재를 넘어 웅동, 비촌, 느랭이재를 지나
섬진나루에선 밀물을 타고 악양으로 갈 것이다
짱짱한 하루 길이다
선 채로 푸지게 잠을 자 두자

홈-마방산과 마방길 도로표지
홈-마방산과 마방길 도로표지
감옥터인 추동교 아래 옥터거리
감옥터인 추동교 아래 옥터거리

한데 어울려 사는 마을 되었으면

내천마을은 35년 전인 198876가구에 397명이 살았는데 지금은 84세대에 158명이 살고 있다. 사람 수는 239명이 줄었지만 세대수는 8세대가 늘었다. 최근 외지에서 들어온 세대가 12세대로 15%에 이른다. 커피집과 밥집, 요양시설 등이 늘어나 활기를 띄고 있다.

정용표 어른과 인터뷰를 마치면서 지역사회와 광양시에 바라는 것을 말씀해 달라고 했다. 어른은 내천은 단합이 좋은 마을이라며 새로 들어온 세대가 10여 세대 되는데 모두 한데 어울려 사는 마을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예전의 반상회 같은 모임이 자율적으로 한두 달에 한 번씩이라도 열려서 서로 다정하게 어울리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다른 어른 한 분은 추동교 동쪽 천변도로에 가드레일을 설치하다 말았는데, 몇 년 사이에 두 사람이나 떨어져 세상을 떠났다. 가드레일을 연장해서 설치해 주길 바란다고 했다. 정용표 어른의 제안과 또 한 어른의 안전 가드레일 설치요청은 며칠 후 옥룡면사무소에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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