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신 광양시 향토문화재보호위원

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
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

광양 고을의 명칭은 삼국시대 백제 때는 마로현이라는 지명으로 사용해오다가 통일신라 경덕왕16(757)년에 희양현으로 변경 고려국이 들어서면서 태조 왕건23(940)년에 광양으로 이름한 것이 오늘에 이르러 천년을 넘긴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고을의 명칭 광양이다.

읍성(치소)의 천읍(遷邑)위치 변천을 보면 백제 때는 수령이 마로산성(마로산성1:2005p21.265)에서 광양 백성을 읍치 했다. 통일신라(757-939)시대 8세기를 전후해서는 현재 광양매일 시장 일대로 옮긴 것이 예상되며 그 이후 통일신라 백여 년을 지나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태종15(1415)년에 강력한 중앙집권 강화를 위한 지방행정 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광양읍성도 규모를 갖춘 치소(읍성)로 기능을 수행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역민과 함께 여러 여러 국난을 거쳐 1994년까지 1200여 년을 읍치를 했던 곳(읍성)이 오늘의 광양읍 오일시장 주위 일대다.

이웃 순천의 유래를 보면 사평·승평·승주·승평·순천으로 이어지는데 고려 충선2(1310)년에 비로소 처음으로 순천이란 고을명과 치소가 바뀌는 것을 보면 불과 700여년이 좀 넘는데 비해 광양은 희양을 거치면서 1200여년 동안 주민을 다스렸던 치소로 그야말로 어느 지역보다 역사가 긴 치소(읍성)이다.

이러한 읍치 시설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들면서 지방행정 구역에 반드시 조성 돼야 하는 필수조건을 분야별로 크게 나누어 보면 행정통치시설, 교육시설, 제사시설 등으로 말할 수 있다. 치소의 읍성이 기능적으로 보면 외적 방어를 하기 위해 쌓은 성()이었지만 공간적으로는 고을의 수령이 있는 중심부를 차지하는 지방도시에 해당된다. 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광양은 중심 치소는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 의미가 집약된 읍성으로 고종9(1872)년에 왕명으로 제작한 광양현 지도(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의하면 읍성안의 당시 18개 관아 건물들의 위치가 객사를 비롯 동헌, 향청, 문루. 등으로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성 밖으로는 어느 고을이던 수령이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향교의 문묘를 비롯해 사직단(명암) 여제단(내우) 성황단(목성)4개 제사기능이 있었다.

이런 장구한 역사를 가진 광양읍성 내에 있었던 건물이 일제시대를 전후해서 존속해오는 동안 그 기능이 변한 것을 보면 객사(광양공립보통학교), 향청(서초등학교 전신인 희양학교개교) 아사(경찰서). 등을 볼 수가 있으나 현재는 흔적도 없으며 또한 관아에서 관리했던 읍성 안밖의 루정(망해루·운주루·청조루·권가루·봉명루 등)도 기록으로만 전할 뿐 그 많은 옛건물 중 복원이나 중건한 건물 한 동 없으니 오늘을 사는 우리 세대가 참으로 부끄러운 세대가 아닌지 싶다. 천년의 고풍스런 광양읍이 신생도시나 다를 바 없는 고을인 양 옛스러운 풍치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광양객사(희양관) 건물
광양객사(희양관) 건물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읍성내에 있었던 객사 사진 한 장이 광양의 천년치소를 말해 준다. 雲草 安範京 회고록 나는 여한없이 살았다”(1993p37)에 등재된 사진(1931년 촬영 광양공립보통학교)으로 본인이 이 학교를 졸업했다는 기념으로 올려놓은 회고록 책()(필자소지) 광양시지(2005년 발간)상임위원을 지낸 김광호 씨에게 흘러 들어가 광양시지 편찬당시 제2p241에 광양교육 현황에 이사진을 올렸다고 했는데 이사진은 우리 광양으로 보아 삼국시대를 비롯 고려 조선을 이르기까지 옛 관아 건물중 천년이 넘은 광양읍치를 말해주는 광양의 상징성있는 객사건물로 유일무이한 사진이며 그 가치는 이루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운초 선생과 김광호 선생에게 깊은 감사에 말씀을 이 지면으로 드립니다.)

객사는 임금의 전패를 모시는 곳이며, 중앙집권적 왕권을 상징하는 건물로 지방읍치 시설중 가장 중심에 자리한 권위 건물이다. 객사는 보통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정청과 동·서익헌은 주로 지붕이 겹쳐 붙은 것 같으나 지붕밑이 분리된 객사(고양 백제관, 전주 풍패관, 나주 금성관)가 있고 지붕은 분리돼 있으나 지붕밑은 같이 연결된 객사(순천 낙안객사)가 있는데 우리 희양관은 낙안객사 모델로 돼 있으며 월대는 작은 석물 계단 4단으로 되어 있다.

천년을 넘게 자리해온 광양읍성의 역사성을 높이며 일깨운다는 취지로 한때는 읍성복원과 성안의 관아건물 객사 동원(봉양각)복원이 한동안 거론이 된 바 있었으나 이미 그 계획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이런 읍성의 안타까움을 안고 있는 광양읍은 더구나 1995년 이후 치소가 중마동으로 옮겨간 그 후부터는 중마동은 세세년년 발전을 하는가 하면 천년을 읍치 했던 광양읍은 삼십여년전 옛날 영화롭던 태평연월은 오간 데 없고 중마동에 비해 많이 쇠해지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이런 광양읍의 활성화 일환과 읍성 주위에 기록으로 전해져오는 광양 천년읍치란 옛문화를 살려 조명 함으로써 시민의 문화위상을 높이는 계기로 삼아 천년읍치를 품은 망해루(읍성남문) 중건을 했으면 하는 필자의 안목이다.

망해루의 역사를 찾아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40(1530) 광양현편 누정에 의하면 籌邊樓懸城南門樓也古稱望海樓永樂戊戌改令名, 勸稼樓在縣南三里,運籌樓在客館 東….” 국역하면 주변루 현 성 남쪽 문루이다. 옛날에는 망해루라 했던 것을 영락무술(1418)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권가루 현의 남쪽 3리에 있다. 운주루 객관동에 있다...”라고 하는 기록이 조선 地誌類(광양읍지)를 통해 전해져 내려온다. 그리고 1983년도 군지 루정편 청조류를 보면 현 읍내리 국제약국 앞에 위치 했던 광양성 남문의 2층 누각의 명칭이다. 동학 농민전쟁당시 소실된 것을 1901년 군수 이중익이 중건 했는데 1923년 민가의 실화로 소실 되었다라는 기록을 보면 읍성의 남문루 명은 역사속 수레바퀴 수순으로 망해, 주변, 청조로 세 차례에 걸쳐 바뀐 것으로 확인이 된다.

망해루를 세운 시기는 고려말 이라고는 하나 어느 시대 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있으며 이 망해루에서 를 지은 예경 崔思儉선생(30대초반졸:1310-15)光陽君에 봉해진 최성지(1265-1330)의 손자이며 이곡 선생(색은 이색 부친)은 최사검 선생을 보고 당신은 과거급제를 안 해도 정승에 오를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도 왜 급제를 했느냐? 라는 賀 崔侍丞登第時 序’”이란 축하 서문이 이곡문집과 동문선 기록으로 보아 그는 당시 지체가 있었던 분인데 광양과의 어떤 연유(緣由)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광양에서 기거 하면서 오언절구로 지은 가 동문선 19권에 그 기록이 있다.

최사검 선생이 광양읍성의 남쪽 문루 망해루에서 바라본 풍경을 읊은 를 보면 하늘이 머니 구름 속에 떠 있는 돛쪽은 작고/ 바람이 살랑 부니 보리 물결이 번뜩인다/ 공사의 여가에 한번 다락에 올라 주위를 바라보니/ 머리를 숙여 임금 은혜에 감사하네(天遠雲帆小/風輕麥浪飜/公餘一登眺/稽首感君恩)”라는 가 있다. 이 시는 고려말 무렵 우리 광양을 배경으로 지은 로 많이 회자(膾炙)는 아니지만,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할것이다.(박혜강광양문학사1’에도 기록됨)

망해루란 최사검 선생의 를 보고 찬양한 의친왕 이강(1887-1955) 선생이 족자에 옲겨 쓴 붓글씨가 조선왕실에 대한 공경과 독립운동으로 연관 지은 것으로 추정이 된다라는 글이 KBS방송 진품명품에도 보도된 바 있듯이 유명한 로 우리 광양의 천년 읍성을 알리는 남문 문루인 망해루 중건으로 광양읍을 역사가 묻어나는 고풍스러운 도시로 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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