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산책-백숙아 광양문화연구회 회장

어린 시절부터 필자는 아버지께 광양의 마을이름 유래를 들어왔다. 그 영향에 힘입어서인지 광양문화에 남다른 애정을 느낀다. 광양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마을이름 유래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어찌나 맞아떨어지는지 신통방통하다. 고무적인 일은 구수한 옛이야기를 지닌 마을마다 맑고 밝고 인정미 넘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점이다.

개현마을에는 1680년경 권 씨(權 氏)가 처음 입촌해 살았다고 전해온다. 1872년에 제작된 광양현 지도에 옥룡면 개현리로 처음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 마을을 개오개’, ‘개고개’, ‘개우개등으로 부른다. ‘라는 글자가 마을 이름 앞에 붙게 된 것은 마을 뒷산이 개의 형국을 띠고 있어서이다. 마을 뒷산에 능선이 잘록한 지점을 개고개라고 부르는데 도선국사가 송천사에서 옥룡사로 오가던 길목이었다고 한다.

개현마을 전경
개현마을 전경

개현마을은 본래 세 똠(마을)?

개현마을은 본래 세 똠(개현, 서재동, 평답)이었는데 모두 합해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은 마을을 이르는 말이다. 원똠인 개현마을은 개의 뒷다리 아랫부분에 속한다. 현재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2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서재동은 개의 밥그릇에 해당된다. 일명 서지박골이라고 부르는데 박 씨들이 사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박 씨 5가구가 살고 있다. 평답은 150여 년 전 한 군수(이 씨)가 매화락지(梅花落地) 명당 터라 하여 입촌해 살았다고 한다. 50여 년 전 그 후손들이 떠난 이후 마을에 이 씨가 없었으나 수년 전 한 세대가 귀촌해 살고 있다.(박채규 이장님이 제공한 자료 참조)

별주부전을 연상케하는 개현마을

개현마을을 들어가려면 내천마을에서 이어지는 개현교(介峴橋)를 지나야 한다. 다리를 절반쯤 지나는데 박채규 이장님이 저만치에서 웃으며 반겨주었다.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다리가 끝나는 지점이 평답이고 그 첫 집이 이장님 댁이었다. 이장님이 직접 만들었다는 돌공원이 울타리 시작점부터 천변 안전설치대까지 펼쳐져 있다.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는 용이 하늘을 나는 모습도 여러 작품이다. 모든 작품이 돌, 썩은 나무, 폐품 등을 활용해 만들어졌다. 친환경교육장으로 활용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박채규 이장님
박채규 이장님

그 아래로 맑은 옥룡천이 흐른다. 용왕바위가 마을을 수호하는 듯 개천 가운데서 마을을 향해 서있다. 용왕바위에 대하여는 수백 년 전부터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이 바위를 마을사람들은 용왕님바위라고 부른다. 바위에 대한 전설에 대해 이장님은 용왕이 토끼의 간을 구하려고 거북을 타고 이곳에 왔었대. 꾀 많은 토끼는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용왕은 돌아갈 시간을 놓쳐버려서 돌이 되어 그 자리에 주저앉게 된 거지. 용왕바위 앞에는 왕자바위, 뒤에는 종(내시) 바위, 아래에는 거북등무늬가 새겨진 받침돌이 있어서 실화처럼 느껴져. 용왕이 먹었던 물로 보이는 우물(용천수)도 있었어. 지금은 없어졌지만. 아마도 별주부전은 우리 동네 이야기를 끌어다가 만든 것 같아라고 말했다. 용왕바위를 제외한 바위들과 우물은 2002년 태풍 루사 때 모두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이장님은 마을의 자랑이자 좋은 관관상품을 놓쳤다며 아쉬워했다. 지금이라도 지자체나 관련 기관에서 관심을 갖고 모두 복원해 관광자원 또는 교육적 자료로 널리 활용되길 바란다.

본래 토끼 모양의 바위는 없었다고 한다. 옛날 이곳을 지나던 노승(老僧)용왕바위 앞에 토끼 모양의 돌을 만들어 마주 보게 세워두면 용왕님이 기뻐하여 마을에 좋은 일이 생길 거다.’라고 하여 마을주민들이 돌을 깎아 용왕바위 맞은편 돌 위에 토끼를 세워둔 것이다. 그러나 매년 홍수 때문에 수난을 겪는 토끼가 떠밀려가는 걸 막기 위해 돌공원 가운데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언젠가 안전장치가 된다면 제자리에 갖다 놓을 거라고 한다.

평답마을 앞 토끼와 용왕바위
평답마을 앞 토끼와 용왕바위

마을 주민 모두 얼굴빛이 환하고 건강미가 넘쳐

옥룡천은 예나 지금이나 여름철이면 아이들이 목욕하고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자연풀장이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니까. 어디 그뿐인가? 백운산을 안고 들어선 옥룡 고을 곳곳이 다 문화재요, 관광명소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답을 지나 오르막길을 걷다 보니 별주부전을 주제로 한 대형 벽화가 그려진 벽이 나왔다. 그 벽을 돌아 마을회관에 도착했다. 동네 어르신들이 큰 방에서 모여 놀다가 뜬금없이 나타난 필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르신들 모두 얼굴빛이 환하고 건강미가 넘쳐나 보였다.

위 왼쪽부터: 이운집(75), 허만순(86), 박채규(77), 홍재두(70), 정금엽(76). 아래 왼쪽부터: 강봉악(82), 소순이(77), 서순례(78), 김순옥(70), 김형남(68), 양인순(79), 김귀임(70), 이선자(71)
위 왼쪽부터: 이운집(75), 허만순(86), 박채규(77), 홍재두(70), 정금엽(76). 아래 왼쪽부터: 강봉악(82), 소순이(77), 서순례(78), 김순옥(70), 김형남(68), 양인순(79), 김귀임(70), 이선자(71)

승용차에 실린 휴대용 스피커와 마이크를 가져와서 노래 한 곡을 합창하자고 했다. 어찌나 구성지게 노래들 하시던지 그런 시간을 갖지 않았으면 서운했을 뻔했다. 박수를 치며 신나게 노래한 후 제일 왕언니로 보이는 할머니께 여쭈었다. “이 마을에 시집와서 행복하셨어요?”라고. 기다렸다는 듯 할머니들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서방님 어찌 생겼는지도 모르고 시집와서 첨에는 여간 힘들었제.”, “낮에 한끝(스무 자) 저녁에 한끝 베 짜는 것도 잼있었어.”, “고무장갑도 비누도 엄써서(없어서) 왕겨 껍데기로 얼음 깨고 빨래 했당께. 지금은 호강이여.”, “이 동네는 인정도 많고 맘도 따숴.” “소 키는 막사가 있어서 냄새가 난께 그거 엄쌜라고(없애려고) 꽃도 많이 숭겄어(심었어). 꽃동네여 꽃동네.” “우리는 마을 입구에서 지켜주는 용왕님이 있어서 다 잘 살아. 부자들이여.” 어르신들은 누구나 자신이 살던 곳이 제일 좋다고 말한다. 몇십 년을 함께 부대끼며 개현마을에서 살아오신 어르신들인데 오죽하랴! 침이 마르도록 동네자랑 하시는 어르신들 말씀에 너무 공감했다.

향교 터로 추정되는 곳

향교 터와 서재동 마을이 궁금해 다시 개현마을을 찾아갔다. 마을 입구에서 이장님을 만나 향교 터로 추정되는 곳을 여쭈었다. 개현마을 바로 왼편 산기슭을 지목하셨다. 위로 정자나무가 서 있고, 측면으로는 개울물이 흐르고, 뒷산이 양팔을 벌리듯 펼쳐져 향교 터를 감싸 안은 형국이다. 산이나 언덕이 모두 세 겹씩 두르고 있어 향교 택지로 알맞은 곳으로 보였다. 향교 터에 대하여는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일 뿐, 고증된 자료가 없어 안타깝다.

맷돌바위에 얽힌 이야기

옛날 개현마을에 미모가 뛰어난 홀로 된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송천사 젊은 스님이 시주하러 갔다가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얼마 후 그 스님이 상사병을 앓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마을 앞에 물길이 없어 논농사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던 여인은 궁리 끝에 스님에게 내기를 제안했다. 미모의 여인은 정성껏 밥을 지어 삼(대마) 뿌리로 길쌈을 삼아 만든 밥상보를 덮어 오겠다고 했다. 스님에게는 동곡마을 앞에서 개현보까지 용수로를 내어 마을 앞으로 물길을 돌려 달라고 제안했다. 스님은 신이 나서 용수로를 뚫어 물길을 돌려놓았다. 일을 끝내고 과부를 기다리던 스님은 용수로 앞에 높이 7미터에 둘레 5미터의 바위 세 개를 포개어 탑을 쌓았다. 그 모양이 마치 맷돌을 포개 놓은 모습과 같아서 사람들은 맷돌바위라고 부른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사랑의 일념으로 해낸 것이다. 어여쁜 여인은 정성껏 밥을 지어 약속장소로 왔다. 그러나 여인을 기다리다가 굶주려 죽은 스님의 시신만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맷돌바위는 현재 소나무가 휘둘러 쌓인 토산 위에 서 있어 정비가 필요한 상황이란다. 이 전설 속 용수로는 실제로 둘이다. 큰 냇물에 있는 것이 큰 보(大洑), 중간에 있는 것은 중보(中洑)이다. 광양시지4439페이지에서 중보(中洑)를 중보(僧洑)로 적고 있는데 이는 오기인 듯하다.

서당이 있었다는 서재동

서재동(서지박골)은 개현마을 왼편의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평답과 개현으로 지나는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들어가면 서재동이 나타난다. 다리거리에서 서재동 사진을 찍다가 그곳에 사시는 서순례 할머니를 만났다. “옛날에 우리 마을에 서당이 있었다는디 지금은 박 씨 다섯 가구만 살고 있어.” 그윽한 눈빛과 다정한 말씨가 평화로운 마을 모습과 꼭 닮으셨다. 서재동 아래로 흐르는 옥룡천이 햇빛에 반짝거려 눈부신 오후다. 인근 사람들이 공부를 하기 위해 서당에 가기 위해서는 돌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 돌다리 이름을 사람들은 서당노디거리라고 부른다. ‘노디는 돌을 듬성듬성 놓아 다리로 이용했던 징검다리를 칭하는 말이다.

서순례 할머니와 서재동
서순례 할머니와 서재동

문화의 꽃을 피워나갈 개현마을!

개현마을은 풍경 그 자체가 한 폭의 그림이다. 마을 구석구석이 옛이야기를 품고 있어 호기심이 요동치는 곳이다. 서재동을 한 바퀴 돌아 나오는데 산들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린다. 이장님이 바람을 생각하며 썼다는 시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늙은 소나무에 걸린 사나꾸줄 그네를 흔들다 말고
무서리 내린 논두렁에 간지럼을 주다가
추수 끝난 논바닥에 맨살로 뒹굴더니
어느새 냇가에서 갈대숲 비집고
노루처럼 긴 목을 적시더니
동구 밖 아줌마 치맛자락에 매달려 어리광을 부린다
녹슨 대문을 두드리다 담장을 넘어가
빈집 마당을 쓸어 놓고
허름한 문풍지를 진종일 울려댄다

박채규 애기바람전문

개현마을은 작지만 알맹이 가득한 석류 같은 곳이다. 옛이야기와 현재적 삶이 잘 어우러져 있는 곳, 그 속에서 활기차게 살아가는 사람들까지. 시간이 더 지나가면 묻혀버릴 수 있는 개현마을의 소중한 문화자원들을 하루 빨리 발굴·보존해나갔으면 좋겠다. 다른 지역에서는 없는 이야기도 사실처럼 스토리텔링해 관광화 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이장님과 마을주민들의 힘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다. 향교 터·서재동·별주부를 연상케 하는 옥룡천·도선국사가 지나다니던 개고개·맷돌바위 등 관광자원이 차고도 넘친다. 지자체와 관련기관, 마을주민들이 뜻을 모아 문화의 꽃을 피우는 고장으로 거듭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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