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에서 밥 한 끼 해요 13

곧고 큰길이 나고서 사람들에게 잊힌 것은 아닐까. 그 때문일까. 8월의 마지막 날, 봉강면 소재지는 정오가 가까운 시간임에도 길가에 차도 사람도 간격이 뜸하다. 올 때 지나쳤던 백운저수지의 아우성치듯 반짝이는 윤슬과 비 갠 백운산 형제봉 위 구름만이 뭉게뭉게 피어나, 그 사이 공백을 메우고 있다. 또 하나 저수지 건너 산허리에 최근 자리한 고급주택들이 옛 시간을 물끄러미 내려보고 있다. 인적이 없긴 마찬가지다. 저수지 주변에 생긴 백운제오토캠핑장을 천천히 걸었다. 물 건너편 물놀이장은 빈 풀장만이 덩그러니 남아 뜨겁던 지난 여름날 기억의 깃발처럼 아스라이 보인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다. 깊어진 물빛에서 가을이 성큼 다가옴을 느낀다.

상류 쪽으로 지금은 부대가 주둔하고 있지만, 예전 이곳은 예비군 훈련장으로 기능했다. 때때로 인근의 부대원들을 교육하는 훈련장으로도 활용되었다. 텅 빈 연병장 또한 쓸쓸해 보인다. 그 시절 연병장을 가득 채운 예비군들과 유격훈련병들의 땀으로 얼룩진 얼굴들이 잠시 오버랩 되었다. 물을 등지고 잠시 젊은 날의 회상에 잠겼다. 그때 훈련장 앞 면사무소 근처 작은 우체국 옆에는 자장면집이 하나 있었다. 운수 좋은 날엔 자장면 한 그릇 게 눈 감추듯 배불리 먹었다. 그러나 자장면집 사장님은 2000년경에 근처로 자리를 옮겨 백반 전문 식당으로 업태를 바꾸신 상태다. 오늘은 30년 전 추억을 먹으러 가보자. , 젊음 가득했던 그 시절 예비군 훈련 조교이자 유격 조교였던 10여명 남짓 도치바우특공대 현역 중에 1인 정 병장^^, 지천명이 넘은 중년이 되어 추억 1인분 주문합니다. 단결!

풍년식당, 봉강면 소재지 하나로마트 건너편에 위치한다. 간판은 머리가 세듯 하얗게 탈색되어 세월을 말해주고 실내 또한 여느 식당과 구분되지 않는 평범함을 가졌다. 9천원하는 백반과 12천원하는 갈치조림과 제육볶음이 차림표의 전부다. 단출하다. 봉강 사람 사장님과 바깥어르신은 면 소재지를 그대로 닮은 인상을 풍긴다. 4가지 김치를 포함해 10여가지 반찬이 둥근 쟁반 위에 놓여나오고 제육볶음과 전어가 포함된 마른생선구이 3가지, 그리고 뚝배기에 시래기 된장국이 밥공기와 함께 추가된다. 천천히 식사를 시작한다. 도시의 점심과는 달리 천천히 체할 일 없는 긴 식사를 마쳤다. 그리움 한 방울 첨가하니 찬 하나하나가 씹는 맛이 구수하다.

그리운 것들은 멀리 있지 않다. 들판은 노랗게 익어 풍년을 기약하고 굽은 길은 그대로 남아 길가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옆으로 곧은길이 났을 뿐이다. 그 길은 빠른 속도로 앞만 보고 가는 사람들의 길이다. 멀리 가고 싶은 사람들의 길이다. 부디 그 길 쉬엄쉬엄 가다가 잠시 좌회전하시라. 길가 어딘가에 차를 멈추고 내려 물가를 걸으며 코스모스 향기에 취하고 오래된 식당에 스르르 들어가 옛 친구를 기억하며 밥 한 끼 천천히 하시라. 언제나 그 자리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광양에서 밥 한 끼 해요. 이번 주는 추억 한 숟가락, 한가로움 한 젓가락 번갈아 가며 느린 시간 속에 자리를 지켜내는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친한 친구 집에 놀러 가 친구의 어머님께서 있는 찬 모두 내어 주시는 밥상 한 끼,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다음 밥 한 끼는 어디로 가지?

글·사진=정은영 민주당 지역위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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