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옹불암(舞翁佛岩)

이상향, 우리나라의 십승지

옛날에는 생산력이 낮아 살기가 매우 힘들었다. 거기에 외침이 있을 때는 적과 싸우면서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흉년, 전염병이 들 때는 기근(飢饉)이 생겼다. 이러한 난세일수록 민중들의 이상향에 대한 열망은 강하게 나타났다. 고전소설 홍길동전의 율도국, 허생전의 빈섬, 토끼전의 용궁 등이 그러한 곳이다. 따라서 이상향은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하면서 당대 민중의 염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상향은 어떻게 보면 관념적인 이상 세계이므로, 영원히 실현할 수 없는 신기루(蜃氣樓)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향은 동서고금(東西古今)에 모두 다 등장한다. 아마도 이상 세계에 대한 갈망은 인류의 보편적인 정서일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중국의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武陵桃源), 토머스 모어(Thomas More)가 쓴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의 섬나라인 유토피아(Utopia), 에스파냐 사람들이 남아메리카 아마존 강가에 있다고 상상한 황금의 나라인 엘도라도(El Dorado) 등이다.

우리나라에도 전란이라는 병화(兵禍)를 겪지 않고 살 수 있는 이상향이 있었을까? 이상향에 대한 열망은 백성들의 삶이 어렵고 힘들수록 백성들 사이에 유행하였고, 이때 예언서들이 난무하여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줌으로써 민중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상향은 자연환경이 좋고, 외적의 침범이나 정치적인 침해를 받지 않으며,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입지 조건을 갖춘 곳이라야 제격이다.

이상향에 대한 관념은 동서양이 다르고 시대에 따라 달랐으며 문화 속성에 따라 차이가 난다. 불교의 극락과 정토, 기독교의 천국과 에덴동산, 도교의 무릉도원, 삼신산(중국 전설에 나오는 봉래산, 방장산(方丈山), 영주산을 통틀어 이르는 말. 진시황과 한무제가 불로불사약을 구하기 위하여 동남동녀 수천 명을 보냈다고 한다. 이 이름을 본떠 우리나라의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이라 이르기도 한다.), 청학동 등은 사후 아니면 관념적인 이상 세계를 일컫는 말이고, 현실의 이상향을 표현한 말로서도 길지(吉地), 낙토(樂土), 복지(福地), 명당(明堂), 가거지(可居地) 등의 용어들이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승지(勝地)라는 말이다. 십승지지는 조선시대에 사회의 난리를 피하여 몸을 보전할 수 있고 거주 환경이 좋은 곳으로 지목된 10여 곳의 피난처를 말한다. 십승지ㆍ승지라고도 한다. 승지는 원래 자연경관과 거주 환경이 뛰어난 장소를 말하는데, 조선 중ㆍ후기 사회 혼란과 경제 피폐가 심해지면서 개인의 안위를 보전하며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피난지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이 관념은 조선 중ㆍ후기에 민간 계층에 깊숙이 전파되어 거주지의 선택, 인구이동, 그리고 공간인식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한국인의 전통적 이상향의 하나이다. 정감록(鄭鑑錄)에 근거한 역사적 용어이며, 십승지라고도 한다. 십승지지에 관한 기록은 정감록중에 감결(鑑訣), 징비록(懲毖錄), 유산록(遊山錄), 운기귀책(運奇龜策),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도선비결(道詵秘訣),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 등에 나타난다. 대체적으로 공통된 장소는 영월의 정동(正東)쪽 상류, 풍기의 금계촌(金鷄村), 가야산의 만수동(萬壽洞), 부안 호암(壺巖) 아래, 보은 속리산 아래의 증항(甑項) 근처, 남원 운봉 지리산 아래의 동점촌(銅店村), 안동의 화곡(華谷, 현 봉화읍), 단양의 영춘, 무주의 무풍 북동쪽 등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진 백운동 원림에 있는 복인복지(福人福地) 돌기둥
강진 백운동 원림에 있는 복인복지(福人福地) 돌기둥

서울 경복궁의 경회루(慶會樓)’의 현판 글씨를 쓴 사람이 위당(威堂) 신헌(申櫶, 1810~1884)이다.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개명 전의 이름이 신관호(申觀浩)이다.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에 있는 국가 명승 제115호 백운동 원림의 본채 옆에 네모지게 커다란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 위당은 삼도수군통제사 시절 이곳에 들러 자이당(自怡堂) 이시헌(李時憲, 1803~1860)에게 부럽다는 말과 함께 써 준 글씨라고 한다. “복인복지(福人福地)”라 쓰인 것으로 보아 아마 위당 또한 정치적 침해를 받지 않는 이런 곳을 이상향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복된 사람이 사는 복된 땅이라는 뜻이다.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이상향은 주로 각종 예언서에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각기 책마다 지목한 10곳이 일치하지 않고 약간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 오랑캐와 인접한 지역인 북한은 외적의 침입이 잦아 십승지에 해당하는 곳이 하나도 없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살기 좋은 도시, 광양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1986위험사회라는 책을 냈다. 이후 위험사회라는 용어는 현대사회의 성격을 규정짓는 새로운 키워드로 등장한다. 오늘날 위험이 현대사회의 중심적 현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과학기술의 발달로 산업사회가 되어 물질적으로 풍요로울지는 모르나 우리 사회의 한편에는 인간의 생명을 도사리는 각종 위험한 요소가 더 커지는 불안전사회라는 것이다.

위험은 성공적 근대가 초래한 딜레마며, 산업사회에서 경제가 발전할수록 위험 요소도 증가하고, 후진국에서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라 성공적으로 과학기술과 산업이 발달한 선진국에서 나타나며, 무엇보다 예외적 위험이 아니라 일상적 위험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존재한다. 현대인들이 환경보호와 웰빙에 관심을 쏟고 각종 보험에 가입하는 행위도 결국 불확실성의 불안을 극복하려는 방안의 일환이다. 따라서 그는 근대화 발전의 성공에 따른 경제적 풍요를 동반한 대형 사건ㆍ사고의 위험을 지적하면서, 지금껏 진행되어온 근대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근대또는 2의 근대로 나아갈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과학과 산업의 부정적 위험성을 감소시키고 궁극적으로 성찰적 근대화의 방향으로 사회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위험사회론은 국가정책의 최우선 과제는 사회적 안전장치 마련에 맞춰져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시사상식사전)

요즘 우리 사회는 이상기후나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각종 재난으로 인하여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전이라는 단어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는 당연한 현상이다. 누구든지 위험 요소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고, 안전한 사회에서 최소한의 생존 조건이라도 보장받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안전지수

요즘 세계 각국의 가장 중요한 정책이 바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안전도 여러 가지 요소로 나누어 평가할 수 있지만, 치안 분야에서만큼은 다행히도 일본이나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안전한 나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안전도를 평가하는 척도는 무엇일까? 실제 국민들이 체감하는 사회안전도를 측정하여 평가지수로 나타낸 것이 사회안전지수이다. 이는 시민의 안전과 불안감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활동, 생활안전, 건강보건, 주거환경이라는 네 가지 분야를 조사ㆍ분석해 점수화한 것이다. 경제활동은 1인당 소득, 고용률 등 소득ㆍ복지ㆍ고용ㆍ노후의 네 가지 세부 영역으로 나눈다. 그리고 생활안전은 치안시설 수, 교통사고 발생건수 등 치안ㆍ소방ㆍ교통안전의 세 가지 세부 영역으로 구분하고, 건강보건은 사망률, 응급의료시설 접근 취약인구 비율 등과 같은 의료환경ㆍ건강상태ㆍ의료충족 등 세 가지 세부 영역으로, 마지막으로 주거환경은 주거비용 부담 정도, 문화기반시설 수 등과 같은 대기환경ㆍ주거보육교육ㆍ문화여가ㆍ인구변동 네 가지 하위 세부 영역으로 나누어 평가한다. 모두 각 영역에는 정량 평가와 정성 평가가 있는데, 이 둘을 합쳐 점수화하여 도시의 순위를 매긴다.

정량은 수학적인 수치로 점수를 매기지만 정성적인 평가는 유동적이다. 안전이나 위험에 대한 인식(risk perception)은 개인차가 있을 수 있고, 심리적인 요인가 결부되므로 정확한 평가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위험한 환경에 놓인 것보다 안전한 환경이 훨씬 좋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되었다고 하더라도 현대인들은 그 불확실성을 학습을 통해서 알고 있다. 따라서 가장 좋은 이상 사회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더라도 위험 요인을 줄이고 통제할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조선시대의 십승지처럼 살기 좋은 고장을 선택하면 해결될 일이다. 자랑스럽게도 광양은 우리나라에서 살기 좋은 도시 상위권에 위치하여 위안이 된다.

호남 3대 명촌

전통 사회에서도 살기 좋은 땅인지 아닌지를 평가하였다. 우리 호남에서도 살기 좋은 땅이 있다. 어느 곳일까? 전통 사회의 명촌(名村)은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배산임수의 길지를 말한다.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武城)마을,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金安)마을,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구림(鳩林)마을이다. 이 셋을 일컬어 호남 3대 명촌이라 불렀다. 고려사이버대학교 염철현 교수는 명촌의 조건으로 지리적 조건, 인물, 마을공동체 의식, 전통의 현대적 계승, 마을의 지속 가능성 등 다섯 가지를 들었다. 호남의 3대 명촌은 모두 다섯 가지 조건에 부합하는 마을이라고 평가하였다.

전통 사회의 명촌에 대한 인식은 오늘날 사회안전지수를 기반으로 살기 좋은 도시를 평가하는 것과 맥락이 동일하다. 현대 자본주의 시대이다 보니 사람들은 서울의 강남 3, 부산의 해운대구의 센텀시티 같은 부호촌을 선호하고, (View)가 좋은 곳에 모인다. 사람이 많이 모이다 보니 자연스레 도시 기반 시설을 확충하게 되고 살기 좋은 도시가 된다. 이런 곳은 학군이 좋고, 교통도 편리하고,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선순환 효과(a virtuous cycle effect)가 일어나게 되므로, 또 사람들이 선호할 수밖에 없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또 모여들어 살기 좋은 곳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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